어느 번역가의 작업 도구들

by 눈큰


늦기 전에 기록을 깁늦기 전에 기록을 남깁니다 니다 ㄴ

내겐 너무 고마운


예전에 김영하 소설가가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소설가들은 손해 보는 게 있다.
작업 도구가 일반인들이 쓰는 평범한 것이다. 신비감이 전혀 없다.
작가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거나, 주식투자가가 앉아 있는 거나 다를 게 없다.”


번역가도 작가와 마찬가지. 작업 도구가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옛날에는 일반인들에게 없는, 무지막지하게 큰 사전이나 전문용어 사전들을 옆에 끼고 번역하면 꽤 폼이 났었는데…. 요즘도 그런 것으로 번역하시는 분이 있을까? 다른 번역가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남들도 다 찾아보는 인터넷 사전을 찾고, 누구나 다 아는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고, 대부분 다 칠 줄 아는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번역한다.

그런데도 내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중에 꼭 ‘내 작업 도구’를 소개하는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알고 보면 너무나 평범한 장비들이지만, 오랜 세월 나와 함께 고생해준 것이 고마워서다. 그뿐인가, 감사패라도 주는 심정으로 사진도 곱게 찍어주었다. 크게 나눠 사전과 노트북뿐인 제 작업 도구들을 소개합니다.



손때 묻은 중한사전
photo by noonknn / Nikon D90

사전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산 고려대학교 『중한사전』은 중문학도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기본 of the 기본 사전이었다. 사진 속 제일 너덜너덜한 녀석, 그만큼 오랫동안 마르고 닳도록 쓴 사전이다. 가방에 넣고 다니면 운동이 꽤 되었는데, 나중에 얇고 휴대성 좋은 『현대 중한사전』을 구입해서 때에 따라 번갈아 가며 썼다.


번역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곧바로 『중한대사전』을 샀다. 기존에 쓰던 사전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저렴하게 중고로 산, 1995년 초판본이었다. '무식'하게 컸지만 다른 녀석들보다 ‘유식’했던 중한대사전은 표제어가 무려 30만 개(가장 많이 쓴 중한사전은 18만 개였다)나 되어서 참 유용하게 썼다. 정가는 18만 원. 그땐 번역 일을 위한 나름의 투자였다. 그 외에 사진에는 없지만, 중국 어학연수 시절 사 온 중중사전과 중국어 도해 사전도 인터넷이 발전되지 않은 시절에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종이사전들을 언제까지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손때보다 먼지가 더 많이 묻은 채로 책장 한구석에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시간을 벌어준 전자사전
photo by noonknn / Nikon D90

중국어의 발음과 성조, 혹은 한자 부수나 획수를 이용해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며 단어를 찾던 나의 시간을 엄청나게 벌어준 녀석이 바로 이 에이원프로 컬러 전자사전(AP703)이다. 가느다란 터치펜으로 한자를 쓰면 곧바로 그걸 인식해서 찾아준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기술이었다.

2~3년 정도 번역 일을 했을 때 번역가라면 요즘 나오는 전자사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남편에게 온갖 애교를 떨어 획득한 아이템이다. 그동안 사용했던 중한사전들은 물론이고 중중사전, 성어사전, 국어사전, 필수 영단어 등 방대한 정보가 수록된 전자사전이니 욕심이 날 수밖에. 내 기억에는 전자수첩 같은 기능도 있었던 것 같다.

이 녀석이 생긴 후로 번역 속도가 크게 빨라졌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36만 원이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았다.


그 당시 남편이 아이를 봐줄 때면 전자사전과 원서만 달랑 들고 시내 카페에 나가 번역 작업을 하곤 했다. 모르는 단어를 전자사전으로 찾으면서 원고를 한번 훑고 나면, 집에 와서는 일일이 사전을 찾지 않고 원서만 보며 미친 속도로 1차 번역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는 카페에서 터치펜을 휘두를 때마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남들의 시선을 더 즐겼던 기억이…. 이제는 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그 후 인터넷 사전이 발전하고 스마트폰 등이 나오면서 손가락이나 전자펜, 심지어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만 해도 금방 모르는 단어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자, 내 전자사전도 서랍 속에서 깊은 잠을 자게 되었다.



미니미니 넷북


남편이 회사에서 쓰다가 집으로 가져온 투박한 노트북을 야금야금 빌려서 번역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내 노트북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생겼다. 그 무렵 때마침 넷북이 유행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번역 일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니 딱 넷북이면 되겠다 싶어 삼성 넷북을 하나 사고, ‘백호’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유치하긴. 내 소유의 첫 노트북이라 애정이 과했다. 인정한다.

그런데 싼 게 비지떡이라던가. 화면 크기가 작은 것이야 알고 샀다 쳐도 갈수록 느려지는 속도 때문에 이래저래 번역하다가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첫정이 담뿍 묻어 있다.



photo by noonknn / Nikon D90


크기는 오케이, 색상은 레드라고요??

넷북의 크기며 속도가 한계에 도달했을 무렵, 남편이 선물처럼 사다 준 내 두 번째 노트북은 첫 번째 노트북보다 훨씬 컸다. 화면은 시원시원하니 좋았으나 색상이 빨간색이라 튀는 색을 질색하는 나에게 처음엔 본의 아니게 약간의 미움(?)을 받았다.

그래도 4년이나 썼는데, 2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내내 골골골 하셨다. 노트북으로 게임 같은 것도 안 하고 오직 번역밖에 안 했는데 거참 이상한 일이다. 하드디스크 포맷과 조각모음을 수시로 하면서 열심히 고쳐 썼는데, 언제부턴가 완전히 다른 노트북에 단단히 꽂혀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불이 들어오는 사과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광팬이었던 나는 주인공 캐리가 쓰던 노트북을 보며 막연히 ‘나중에 나도 저런 노트북을 사서 글도 쓰고 작가도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윈도가 아닌 맥 OS를 쓸 자신이 없었고 맥북 가격도 사악해서 번번이 망설이기만 했다.

그럼에도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그놈의 사과! 원래 쓰던 노트북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지금 용기 내지 않으면 내 평생 그 사과는 영영 못 갖게 될 것 같아서 이것저것 열심히 알아보고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남편의 도움 없이 내가 번 번역료로 산 맥북프로 2015년형, 사과에 불이 들어오는 마지막 모델이다.

맥 OS에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요즘은 되려 윈도를 몰라서 헤맨다.) 게다가 마우스를 버리게 만드는 트랙패드의 매력, 짱짱한 디스플레이, 신형 노트북과 달리 다양하고 많은 단자와 슬롯, 어느 하나 내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밖에 들고 다니기엔 묵직하다. 예쁘니까 용서해주는 거로. 제가 안 돌아다니면 되죠.


무엇보다도 5년째 쓰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버벅거린 적 없이 내 번역 일을 돕고 있다. 정말 이름처럼 ‘프로’답다. 그게 만족스러워서 이후로 아이패드, 애플펜슬, 에어팟, 애플워치까지 줄줄이 장만한, 소위 ‘앱등이’가 다 되어버렸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과는 단연 ‘맥북프로’다. 번역이든 글쓰기든 오래오래 나와 함께 작업해주길.



작업 도구 소개를 이렇게 끝낸다. 역시 평범한 듯하지만 그 평범한 도구들로 만들어낸 나만의 특별한 과거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앞으로도 내가 가진 작업 도구들을 아껴 쓰며 즐겁게 일할 것이다. nn


photo by noonknn / Nikon D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