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by 눈큰
계획 왕


학교에 다닐 때 제일 좋아했고 잘했던 일은 ‘계획 세우기’였다.

초등학생 때는 동그란 시계 그림에 알록달록하게 방학 계획표를 그려 넣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더니, 중고등학생 때는 학생 수첩에 시험공부 계획을 세우는 일이 내겐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공부 계획을 세웠는가 하면, 단순히 ‘언제 무슨 과목 공부’ 이런 게 아니라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부터 몇 시 몇 분까지는 무슨 과목, 무슨 문제집을 몇 페이지에서 몇 페이지까지 공부’ 뭐 이 정도. 조그마한 수첩 칸에 개미 눈곱만한 글자를 빼곡히 집어넣으며 시험 계획을 세우느라 자습 시간을 몽땅 다 써버린 적도 많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계획대로 공부를 끝내지 못하면, 이후 계획들을 조금씩 다 수정하는 데 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병적 수준 같기도 하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수정하고 또 세우기를 반복하며 시험날까지 어떻게든 억지로 ‘가로줄’을 다 긋고 나면 나름 보람을 느끼곤 했다.

그 수첩들을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모르겠다. 날 닮아서 날마다 인생 계획을 세웠다가 바꿨다가 하는 큰아이와 대체 누굴 닮아서 계획 세우는 걸 세상 귀찮아하는지 모르겠는 둘째 아이에게 그때의 내 수첩을 보여주면 참 재미있을 텐데.



계획이 없으면 시작도 없다


나의 그런 유별난 습관은 번역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샘플 번역을 의뢰받는 순간부터 나는 그 책의 분량과 난이도에 맞게 대략의 번역 일정을 미리 머릿속으로 짜 본다. 그러면 나중에 최종 역자로 선정되었을 때, 곧바로 출판사와 번역 기간을 조율하기 쉽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200쪽가량의 책 한 권을 두 달 정도 번역한다. 번역 속도가 빠른 번역가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거의 그랬다. 만약 그 기간에 명절 연휴(가정주부에겐 어쩔 수 없는…)가 끼어있거나 중요한 개인 일정이 있다면 미리 담당자에게 말해 기간을 조금 더 달라고 말한다. 프로답지 못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사정을 말하고 기간을 미리 조율하는 것이 더 프로답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말로 번역하고 싶은 책을 맡았는데 그 책의 출판 일정이 급하다면, 조율 따위는 하지 않고 최대한 출판사가 원하는 일정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번역 기간 때문에 그 책을 다른 번역가에게 뺏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럴 때는 밤을 새우더라도 무조건 마감을 지켜 납품한다.



한 권의 책을 번역하기까지


마감일이 확정되고 나면 드디어 즐거움의 시간이 찾아온다.

캘린더 앱을 열고(예전에는 책상 달력에 연필로 썼다) 원서 페이지 수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서 번역 스케줄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몇 시간씩 공을 들여 계획을 세운 후에야 번역 작업에 돌입한다.

내 경우에는 책 한 권을 1차 번역, 1차 교정, 중간 교정, 최종 교정, 이렇게 네 단계를 거쳐 번역한다. 평일 오전에는 그날 정해져 있는 분량을 1차로 번역하고, 오후에는 전날 했던 부분의 1차 교정을 본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그 주에 했던 분량을 모두 모아 중간 교정을 본다. 모든 번역과 중간 교정이 끝나고 마감이 1~2주 정도 남았을 때,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를 찬찬히 훑어보며 전반적인 문장의 톤이나 어휘 등을 통일시키고 오류를 점검하는 최종 교정을 진행한다.


이 네 단계에 맞춰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짜 두지만, 변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선 컨디션에 따라 번역이 잘 풀리는 날도 있고 안 풀리는 날도 있다. 또 예상치 못했던 일, 가령 몸이 아프다거나 급한 볼일이 생기면 한동안 스케줄이 완전히 엉망이 되기도 한다. 그뿐인가. 예전에 번역한 책의 역자 후기를 뒤늦게 써달라는 요청이 갑자기 들어오기도 하고, 인쇄 직전의 최종 pdf 파일을 주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오류가 없는지 체크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그런 일은 작업 시간도 꽤 걸리지만 되도록 빨리해줘야 하는 일이라 모든 계획을 일단 뒤로 미뤄야 한다. 그리고 당분간 엉덩이를 의자에 딱 붙이고 앉아 열심히 일만 해야 한다. 다음 주 계획에 최대한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번역은 잠과 같다.
한 번에 몰아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이도 말고 적게도 말고 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번역가와 시간' 중에서


계획이 있으면 고민이 없다


미리 짜둔 계획에 하루하루 가로줄을 그으며 두 달을 보낸다. 못 지킨 계획이 있으면 꼬박꼬박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 이쯤 되면 ‘번역가’ 말고 스케줄 관리와 관련된 직업을 선택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계획을 잘 세운다고 공부나 일을 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 어차피 변수가 많아 번번이 수정해야 하는 계획을 뭣 하러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세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이 지독한 계획 세우기는 번역 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번역 마감일을 어긴 적이 없으니.

‘시간 부자’처럼 보이는 프리랜서는 시간이 너무 ‘프리’하다며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마감에 쫓겨 큰일이 난다. 특히 나처럼 번역하다 말고 살림하고, 또 번역하다 말고 육아해야 하는 번역가에게는 선택과 집중을 도와주는 그날그날의 ‘구체적인 계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날마다 할 일이 명료하게 정해져 있으면 고민할 것 없이 딱 그 일만 해내면 되니까.



계획이 있다는 건 행복한 것


인생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또 그 계획대로 척척 실천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번역가인데도 번역 일이 없어 휑한 내 달력을 보고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많다. 다음에 번역할 책이 줄을 서 있어서 번역 계획만으로 빈틈 하나 없이 빼곡한 달력을 갖게 되는 날이 과연 나에게도 올까? 여름휴가니, 연차니 얼마든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 참, 프리랜서인 나에겐 원래 여름휴가나 연차 따윈 없었지!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