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모르겠고, 오늘 구운 빵은 맛있습니다

by 눈큰


나의 아침 식사를 책임지던 빵이 있었다.


집 앞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팔던 ‘호두호밀브레드’란 빵이었는데, 언제나 다 먹어치우기 전에 꼬박꼬박 새 빵을 사 왔기에 항상 우리 집 식탁 위에 놓여있던 빵이었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에 견과류가 무심한 듯 콕콕 박혀있던 그 담백한 빵은 딱 내 취향이었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 오븐 토스트기에 살짝 구워 먹거나 잼을 발라 먹어도 좋았고, 출출한 오후에도 커피와 함께 먹는 간식으로 부담 없어 좋았다. 나름 호밀빵이니까 흰 밀가루 빵보다는 건강하고 살도 덜 찔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참 꾸준히도 사 먹었던 빵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빵집에 가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빵이 놓여있지 않았다. 처음에 한두 번은 ‘벌써 다 팔렸나?’ 아쉬워하며 입을 삐죽 내밀고선 다른 빵을 사 갔다. 내게 맛있는 빵이면 남도 맛있겠지, 게다가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가격도 합리적이니 금방 팔릴 수밖에 하면서. 그런데 그 후로도 계속해서 그 빵은 제자리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단종이라고, 아, 이런….

이제 무슨 빵을 먹어야 하지?

매장을 몇 번이나 뱅뱅 돌아봐도 그 빵을 대체할 만한 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였지. 그 빵집에서는 요란한 광고와 함께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 ‘건강빵’들을 잔뜩 출시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며 우아한 광고 카피가 얄밉기 그지없던 새 빵들. 이러려고 내 최애 빵을 단종시킨 거군, 나는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그 빵들을 째려보았지만, 출시 기념으로 가격 할인을 많이 해주기에 일단 사서 맛을 봤다. 맛있고 건강한 빵임은 분명하군. 하지만 이걸 계속 사 먹기엔 가격이 너무 사악해.


그 후 만만한 식사빵을 찾아 헤매던 나는 어느 날인가 문득 ‘이럴 게 아니라 내가 빵을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일이 없어 남아도는 건 시간이요, 우리 집에는 작지만 야무진 오븐도 하나 있고, 유튜브에는 좋아요와 구독을 기다리는 베이킹 레시피들도 넘쳐나니까. 빵 그까짓 거 밀가루에 이스트 넣고 대충 반죽해서 구우면 되는 거 아니냐며.(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의 홈베이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라 경제에는 도움이 안 되겠지만 우리 집 경제에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픈 마음에서 어느 날 갑자기 무심코.

그러다가 홈베이킹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본격적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건 첫 번째로 도전한 통밀빵을 단번에 성공시킨 바로 그 순간부터다. 그 후로 거의 일주일에 한 가지 빵 레시피를 도장 깨기 하듯 도전하고 있으니까. 이런 내 모습이 나조차도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이 마치 나의 본업과 묘하게 닮았다.

20년 넘게 나의 자존감을 책임져 오고 있는 번역 일 말이다.

벌이는 시원찮았지만 책을 번역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텼던 세월인데, 꽤 오래전부터는 반백수가 아니라 온백수 상태로 지내고 있다. 한동안은 ‘중국어 번역 일감 자체가 예전만 못하나?’ 아쉬워하며 의뢰가 들어오길 기다렸으나,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박했던 호밀빵이 폼 나는 건강빵에 밀렸듯, 나는 젊고 유능한 번역가에게 밀리고 AI에게도 밀린 게 분명하다. 일감이 있다 한들 나에게까지 차례가 주어질 것 같지 않다.

이제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내야 하지?

아무리 여기저기 큰 눈을 굴려봐도 번역 일을 대체할 만한 일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입맛에 맞는 빵은 그나마 어설픈 재주로 흉내 내어 만들어냈지만, 오십 둘이란 어중간한 나이에 새로운 일거리는 쉽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빵 만드는 시간만 늘어났다. 정말 좋은 취미지만, 너 다섯 시간 걸려 정성껏 만든 빵을 선물한 사람에게 “너 이러다 빵집 차리겠어”라는 걱정 어린 칭찬을 들을 때면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나 싶어 현타가 오기도 한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 지금은 빵 만드는 게 재미있는걸.

하도 재미있어서, 매번 베이킹 과정을 신나게 글로 기록해 두고만 있다. 언젠가 무엇이라도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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