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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Mar 12. 2020

번역가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


이틀 전 전자도서관에서 e-book을 한 권 빌렸다.

읽고 싶은 책이어서 대출 예약을 걸어놨었는데, 대출되었다는 문자가 왔기에 냉큼 다운받았다.

온종일 교정만 봐서 눈을 감아도 눈앞에 글자가 둥둥 떠다닐 지경이었지만, 책 내용이 궁금해서 밤이 늦었음에도 기어코 아이패드를 켰다.


아니 근데…

그 책 번역이, 번역이, 기가 막히게… 엉망이었다.

원서가 영어인 번역서였는데 번역투가 좀 심했다. 분명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데도 영어책을 그대로 읽는 느낌이랄까? 심지어 어순도 영어 그대로…. 독자인 내가 일일이 속으로 어순을 바꿔가며 읽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


물론 처음에는 내가 종일 너무 교정을 열심히 봐서 그런가 했다. 그래서 이른바 번역가들의 고질병, 즉 ‘자기 역서 교정은 제대로 못 보면서 남의 역서를 읽으며 괜히 트집 잡고 교정하려는 병’이 또 도졌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몇 페이지를 더 읽어봐도 번역투는 계속되었다. 그나마 프롤로그 부분의 번역은 나은 편이었다. 앞부분이니까 좀 신경 써서 번역했겠지.


아무튼 남의 책까지 교정보며 읽어야 하나 싶어서 그만 아이패드를 끄고 잤다.


그리고 어제.

전날 주문했던 책 두 권이 배달되었다.

벌써 12년째 해마다 증보판이 나오는 열린책들 편집부의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2020>과 일본어 번역가 권남희 님의 에세이집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다. 꺅~


일단 편집 매뉴얼. 내겐 참고서 같은 책이라 올해 증보판 나오길 기다렸는데, 뭐가 바쁘다고 이제야 샀다. 이번 번역 끝나면 바로 훑어보는 걸로!


그리고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번역가의 따끈따끈한 새 에세이. 늘 블로그를 통해서 옆집 사는 친한 언니의 이야기처럼 소식을 읽곤 하지만, <번역에 살고 죽고>란 책 이후로 그분의 새 에세이가 나오길 얼마나 기다렸던지.


사실 어제도 온종일 교정을 열심히 봤고 눈을 감아도 눈앞에 글자가 둥둥둥 떠다닐 지경이었지만, 책 내용이 궁금해서 잠도 미루고 책장을 넘겼는데….


그래! 이런 게 바로 번역가의 글이지 싶은 문장들. 깔끔하고 매끄러운 문장이 따뜻하고 재미있기까지…. 종일 쌓인 교정 스트레스가 싹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부디 저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오래오래 번역해서 역서도 많이 내시고 글도 계속 써 주세요. 제발~ n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번역가의 서재’를 취재하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송합니다. 서재가 없어서요” 하고 거절하지만, 정말 없어서 거절하는 거라고는 믿지 않는 눈치다. 믿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참고로 내 작업 공간은 이렇다. 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주방, 오른쪽에는 거실. 앞에는 텔레비전, 옆에는 소파, 발밑에는 멍멍이. 주부미가 철철 넘쳐 난다. 이러니 따뜻한 번역이 절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번역가라는 수식어보다 ‘번역하는 아줌마’라는 말이 더 좋다.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번역하는 아줌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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