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큰 Jun 20. 2020

힘든 선택, 즐거운 선택

그리고 힘들어도 즐거운 선택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마지막 편에는 흉부외과 늦깎이 레지던트 도재학이 의사로서 가장 힘든 점에 대해 토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어라 공부해서 의사가 됐단 말이에요. 근데 세상에나… 이 직업은 공부도 공부지만 판단을 잘해야 하네.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선택이야. 수술도 다 판단이고 선택이야. 교수님, 근데 저는 제일 부족한 게 판단력이에요. 머릿속에 든 건 많은데 이걸 언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떡해요? 교수님.



번역가인 나 역시 한 줄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가 선택의 연속이다. 결정 장애가 심한 내가 그나마 환자의 목숨이 아니라 문장을 앞에 두고 선택과 판단을 하는 게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ㅎㅎ;; 그런데 사실 나는 도재학과 다르게 그 선택이 재미있을 때가 많다.


어린이 만화책을 처음 번역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알다시피 만화책엔 의성어와 의태어가 참 많이도 등장한다. 그런데 중국어의 의성어와 의태어는 생각보다 되게 한정적이다. 아니지, 표음문자에다가 어휘가 풍부한 우리말을 중국어가 도저히 따라올 수가 없는 게 맞는 이야길 듯.

아무튼 나는 그때 아이들이 읽는 만화책을 좀 더 맛깔스럽게 번역하고 싶었다. 매번 ‘哈哈(하하)’ ‘嘻嘻(히히)’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대로 ‘하하, 히히’ 하고 옮기는 건 너무 게으르고 재미없는 번역이니까.

일단 나는 아이 방에 있는 만화책들을 모조리 꺼냈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표현을 몽땅 수집했다. 거기엔 웃음소리만 해도 ‘꺄르르, 껄껄, 데헷, 씨익, 우왓, 우하하, 움하하하, 캬캬, 큭, 케케케, 푸핫, 풉, 후훗’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어디 웃음소리뿐인가. ‘꼬질꼬질, 끄응, 두둥, 또잉, 뜨악, 버럭, 빠직, 부들부들, 샤방, 샤샤삭, 소오름, 스윽, 오싹, 움찔, 와락, 주섬주섬, 촤르르, 파르르, 화라락, 휘이이’ 등 익살스러운 표현이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유레카! 나는 그걸 행동, 상황, 소리 등등으로 구분해서 몽땅 받아 적은 뒤, 번역하는 내내 원서에 맞게 신나게 골라 썼다.


물론 이건 가장 재미있는 선택의 경우고…

만약 원서 자체가 너무 진지하거나 혹은 지루한데 책의 저자가 습관적으로 똑같은 단어까지 반복해서 쓰고 있다면, 그때는 유의어 사전을 열심히 뒤져서 조금이라도 쉽고, 명료하고, 색다른 단어를 골라 쓰려고 노력한다. 그게 상당히 까다롭고 고민스러울 때도 많지만, 그 선택 역시 나는 재미없지 않다.


photo by 눈큰 / Nikon D90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에 갔다. 그때처럼 걱정한 적이 없다. 그곳에서는 포털사이트를 열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연설문 쓸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정상회담이 끝난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미리 ‘말하다’의 유의어를 30여 개를 준비해 갔다. 연설문에 가장 많이 쓰일 것 같은 단어가 ‘말하다’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눴다’, ‘얘기했다’, ‘언급했다’, ‘표명했다’, ‘피력했다’, ‘강조했다’, ‘희망했다’, ‘설명했다’, ‘밝혔다’, ‘반박했다’, ‘뜻을 같이했다’, ‘토로했다’, ‘설득했다’, ‘공감했다’, ‘주장했다’, ‘권유했다’, ‘호소했다’, ‘합의했다’ 등.
(중략) 우리말은 어휘가 풍부하다. 이는 축복이자 재앙이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좋은 글은 쓸 수 있는 첨단무기가 되지만, 어휘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글쓰기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이 걱정인가. 조정래 선생처럼 더 맞는 단어를 찾아 고치면 된다. 마크 트웨인같이 반딧불이 아닌 번갯불 단어를 찾아 쓰면 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처럼 그 자리에 딱 맞는, 하나뿐인 단어를 쓰면 된다. 그 모든 게 국어사전에 있다. 국어사전을 열어놓고 글을 쓰는 순간 나는 김훈 작가보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이 된다.
- <강원국의 글쓰기> 중에서


번역 일이 아닌 삶의 선택도 그렇게 재미있으면 좋으련만….

사실 나는 아이스크림 종류가 네다섯 개 정도 돼야 골라 먹는 재미가 있지, 그게 31개나 되면 고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ㅎㅎ 또 햄버거도 만들어진 걸 고르는 게 좋지, 토핑이며 소스를 일일이 고르라 하면 갑자기 심각해진다. 큰 백화점보다는 중간 규모의 마트가 편한 타입.


그런 내가 며칠 전에 남편과 함께 전통시장에 침구류를 사러 가서는 얼마나 결정 장애에 시달렸던지. 차곡차곡 쌓여있는 수많은 이불 중에서 우리 집에 어울리는 이불을 고르는 것은 그야말로 힘든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나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그 이불집 아주머니는 진심 대박이었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공짜 아이스커피부터 덥석 손에 쥐여주며 손도 발도 꼼짝 못 하게 만들더니, 내 말과 표정을 열심히 읽으며 마음에 들 만한 이불들을 딱딱 꺼내어 펼치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이미 지갑을 열어 이불 값을 지불하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열심히 이불을 싸고 있고, 옆에 서 있던 다른 아주머니는 잘 선택했다고 맞장구치고 있고, 아무래도 두 아주머니는 한패(?)인 것 같고, 어느새 남편 손에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꾸러미 같은 이불 보따리가 들려있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우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결국 아주머니가 추천한 걸로 다 산 거 같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저 ‘잘 샀겠지?’ 하며 속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한다…. ㅠㅠ n


매거진의 이전글 번역가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