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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Jul 29. 2020

시고르자브종 때문에 빵 터진 사연

같은 말 다른 느낌


어렸을 때 거대한 괴물 같은 개(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평범한 크기의 진돗개였던 듯)에게 쫓긴 후로는 목줄을 한 조그마한 강아지도 무서워서 멀리 돌아갔던 내게 요즘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나 ‘개는 훌륭하다’와 같은 반려견 프로그램의 열혈 애청자가 된 것. 그것도 모자라 유튜브 등에서 강아지 관련 영상을 찾아보며 마치 손주 보듯(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 “아이고, 이뻐라!” 연신 감탄하고 있다. 

그런 나의 눈에 완전 꽂힌 견종이 하나 있으니….


바로 시골 똥개, 이른바 믹스견 되시겠다.

천사 같은 눈, 떨어져 나갈 듯 흔들어대는 꼬리, 천지도 모르고 낑낑거리며 돌아다니는 인절미 댕댕이들을 보고 있으면 왜 그리 좋은지! 더럽게(ㅎㅎ) 말 안 듣는 우리 집 똥강아지 아들들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 혹시라도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면 꼭 그런 똥개 한 마리 키워야지 싶을 정도. 


아무튼 그 치명적인 매력덩어리들이 보고 싶어 검색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런 강아지들을 ‘시고르자브종’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뭐라고요? 견종 이름이 그렇게 근사하다고? 너무 멋지다! 다른 외국 견종 이름 저리 가라인데?라고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시고르자브종’에 대해 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시고르자브종’이란, 애견인들이 시골 똥개들에게 애정을 담아 새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시고르(시골) 자브종(잡종) 이라나 뭐라나.

세상에 얼마나 예쁜 이름을 가진 견종이 많은가. 그런데도 시골에서 키우는 댕댕이들을 그냥 뭉뚱그려 ‘똥개’라고 불렀으니, 그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속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고오급진 이름을 지어준 거라고.

세.상.에.

나는 정말 한참을 웃었다. 막상 알고 나서 그 단어를 읽어 보니 누가 들어도 ‘시골 잡종’처럼 들린다. 아무리 개와 견종에 대해 1도 모르고 살아온 나지만, 감쪽같이 속았지 뭐냐.

아무튼 그날 나는 ‘시고르자브종’이 생각날 때마다 풋! 하고 웃기를 반복하며 종일 기분 좋게 지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시골 똥개’라는 정감 있는 말을 두고도 ‘시고르자브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반색했던 나를.

외래어로 된 수많은 견종 이름이나 국적도 추측이 안 되는 생판 낯선 단어인  ‘시고르자브종’을 듣고 왜 한글보다 더 세련되고 폼 난다고 생각한 걸까? 외래어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많다.

얼마 전 제로 웨이스트와 미니멀 라이프에 관한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그 서평을 쓰기 전까지 나는 제로 웨이스트라는 말을 몰랐다. 처음엔 뭔가 새롭고 근사한 라이프 스타일처럼 들렸지만, 알고 보니 여태까지 ‘쓰레기 줄이기, 환경 보호 운동’  등으로 불리던 그것이었다.

근데 참 이상했다.

왜 ‘제로 웨이스트’라 하면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고, ‘쓰레기 줄이기’라 하면 왠지 귀찮고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지는 걸까? 또 ‘미니멀 라이프’라는 말은 왜 ‘소박한 삶, 간소한 삶’이라는 말보다 괜히 더 수준 높아 보이는 걸까? ㅜ (하긴 뭐 ‘제로 웨이스트’라고 불러서라도 사람들이 쓰레기 줄이기에 좀 더 동참할 수 있도록 한다면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


최근 번역을 끝낸 동화책에서 중국어로 ‘海神之子’ 즉, ‘바다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유람선이 나왔다. 처음에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바다의 왕자’ 호로 번역했다. 그런데 교정을 하다 보니 왠지 그 이름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도 생각나고, ‘다시 돌아온 바닷가~’로 시작되는 박명수 노래도 생각나고, 요즘 아이들은 나보다 영어도 잘하던데 아무리 동화책이지만 호화 유람선 이름치곤 좀 촌스러운 거 아닌가 생각되었다.

결국 나는 최종 교정 결과를 제출할 때 혹시 ‘바다의 왕자’ 호를 ‘마린 프린스’ 호로 바꾸는 건 어떠냐고 출판사에 슬쩍 제안했다. 뭐 출판사에서는 그냥 그대로 둬도 상관없겠다고 해서 조금 무안하다 말았지만.


아무튼 번역가인 내가 우리말을 적절히 잘 써도 부족할 판에 이래도 되나 싶다. 내 번역 노하우 파일에 ‘순화어’를 그렇게 열심히 가나다순으로 정리해놓고서 말이다.


물론 무조건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 거 아시죠? 전문용어를 너무 쓸데없이 우리말로 길게 풀어쓰거나 쉬운 외래어를 두고 굳이 어려운 한자어로 대신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독성 떨어지는’ 글이 되니까. 다만! 적어도 ‘우리말은 촌스럽고 외래어는 세련되다’라는 생각만큼은 이제 그만 버리자고, 시고르자브종 때문에 웃다가 살짝 반성해본다. n


photo by 눈큰 / Nikon D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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