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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Oct 06. 2020

쓸데없이 진지한

번역가의 글꼴 선택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재미있는 사진 중에 ‘글씨체의 중요성’이란 제목의 사진이 두 장 있다.

‘영원히 너와 함께 할 거야’라는 글을 두 가지 버전의 글꼴로 써 놓은 것인데, 분명 똑같은 글을 똑같은 색으로 써놓았음에도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핑크빛 달달한 연애소설 같은 느낌이라면, 하나는 핏빛 살벌한 공포소설 같은 느낌이랄까. 제목 그대로 글꼴의 중요성을 단박에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런데 종일 글과 씨름하는 나는 이걸 본 적 없을 때도 그 중요성을 너무 잘 알아 탈이었다.


나의 맥북에서 한글 파일을 새로 만들면 무조건 ‘함초롬바탕체’로 글이 써진다. 그러면 나는 대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눔고딕체’로 변경한 뒤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기본 서체를 변경하는 법을 아직 찾지 못한 탓에(혹시 아시는 분??) 번거롭지만 매번 그렇게 한다. 내 느낌에 나눔고딕체는 마치 어떠한 반찬과도 잘 어울리는 흰밥처럼 기본에 충실한, 즉 가독성이 높은 글꼴이다. 그러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유연해 보여서 제일 애용한다.


하지만 얼마 전 또 하나의 샘플 번역을 맡아서 한글 파일을 만들었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 파일을 열어 제목과 첫 줄을 입력하다 보니 왠지 함초롬바탕체가 샘플 번역할 책의 내용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경우는 종종 있다.

번역하려는 책의 성격에 맞게 글꼴을 선택하여 작업하는 것. 이를테면 그림책을 번역할 때는 손글씨체 중 하나를 골라 작업하고, 글밥이 많은 동화책은 조금 동글동글한 느낌이 나는 글꼴로 작업한다. 또 자기 계발서는 명조체 같은 것을, 심각한 심리학 책은 고딕체 같은 것을 그때그때 골라 번역한다. (물론 번역 에이전시에 원고를 보낼 때는 바탕체로 바꿔 보냅니다. 대개 그렇게 해달라고 하거든요.)


별걸 다 신경 쓰시네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 효과를 아시는 분도 계실 듯.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문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휩쓸린 내 번역 문장들은 책에 따라 때로는 귀여웠다가, 다정했다가, 차분했다가, 진지해지곤 한다. 번역에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보태려는 마음에 시작된 나만의 놀이랄까. 번역할 책을 대충 훑어본 후에 새로 만든 한글 문서 앞에 앉아 신중하게 글꼴을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웃겨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ㅎㅎ


뭐 암튼 그러니까 이번에 의뢰받은 샘플 번역은 좀 차분한,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면 안 되는 책이었는데, 내 느낌에 함초롬바탕체가 딱 적절한지라 그대로 두었다는 말씀.


나는 번역을 하다 말고 갑자기 ‘함초롬’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 궁금해서 사전에 찾아보았다.

‘젖거나 서려 있는 모습이 가지런하고 차분한 모양’이란다.

그래, 어쩐지, 그렇게 보이더라, 이름 한번 잘 지었네, 하면서 나 역시 가지런하고 차분한 모양으로 번역을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가지런하고 차분한 모양으로 ㅎㅎ 역자 선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조금 재미는 없는 책이지만(시무룩) 그래도 좋은 결과 있었으면….

음…

궁서체로 보낼 걸 그랬나? 나 무척 진지한데…, 또 몇 달을 백수로 놀기 싫은데…. n



photo by 눈큰 / Nikon D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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