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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Nov 24. 2020

얼굴도 모르는 고마운 그대

코로나 이전부터 비대면이었던 갑과 을


오랜만에 외출했다.

얼마 전 번역한 대만 그림책의 번역 계약서를 번역회사에 보내려고 우체국에 다녀온 것.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가 격리를 했던 우물 안 번역가는 대충 입고 우물 밖을 나갔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는….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은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낭만적이기만 하던데, 이 매서운 추위는 뭐지, 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ㅎㅎ


그나저나 이번 그림책 번역은 계약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 후다닥!

샘플 번역 과정도 없이 단독으로 들어온 의뢰라 원서 파일을 받자마자 작업했는데 분량이 적어 1~2시간 만에 끝난 거다. 물론 바로 납품하지는 않았고, 이틀 동안 수십 번 읽고 다듬기를 반복한 뒤 책 그림만큼 예뻐진(?) 원고를 보냈다. (원래 주어진 번역 기간은 1주일이었지요) 그때까지도 계약서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


대개 최종 역자가 되고 번역 기간이 확정되면 번역회사 담당자가 일주일 안에 번역 계약서를 만들어 등기로 우리 집에 보낸다. ‘갑’(번역회사)의 도장은 찍혀 있으나 ‘을’(나)의 도장이 없는 두 장의 똑같은 번역 계약서를 말이다. 그러면 나는 을 란에 주민등록번호, 주소, 이름을 자필로 쓰고 사인 혹은 도장을 찍어서 한 장은 내가 보관하고 다른 한 장은 다시 번역회사에 등기로 돌려보낸다. 그러니까 내가 번역한 책 수만큼 우체국을 간 셈! 나의 소중한 번역료를 책임져주는 A4 종이를 들고 다녀오는 우체국 나들이는 언제나 기분 좋다.


이렇듯 나의 돈벌이 과정은 언제나 우편이나 이메일로 시작해서 우편이나 이메일로 끝난다. 특별하게 의논할 일이 있지 않으면 전화 통화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처음 번역 일을 맡았을 때부터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갑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만약 내가 서울에 살았다면, 아니면 번역가를 직접 만나 번역 방향을 논의해야  필요가 있는 까다로운 원서를 맡았거나 의욕이 넘치는 출판사를 만났다면, 혹은 직접 찾아와 정중히 번역을 부탁할 만큼 내가 잘나가는 번역가였다면 가볍게 한두  갑을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방에 사는  나가는 번역가는 여태까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초초초보 번역가였던 내게  기회를  친절한 목소리의 팀장님 얼굴도, 18년간 여러  바뀐 중국어 담당자들의 얼굴도 나는 모른다. 간혹 개인적 이야기를 1 나눈  없는 담당자가 되려 내게 그동안 고마웠다며 퇴사 메일을 보내올 때면   바를 모르기도 한다.

번역도 결국은 일이고 사회생활인데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 그래서 내가 번역가로 성공을 못했나 하는 마음.

그렇다고 지금 내가 먼저 불쑥, 그것도 코로나 시국에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ㅎ

물론 나는 소심쟁이 집순이니까, 굳이 얼굴까지 알고 지낼 필요 없이 일할 수 있는 번역가란 직업만 믿고 이렇게 일했다. 하지만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을 듯. ‘마스크 인류’라는 말까지 생기고 이러다가 얼굴마저 잃어버리진 않을까 걱정되는 요즘엔 얼굴도 모르는 고마운 그대들을 만나 가볍게 따뜻한 커피 한잔 마셔도 아무 문제 없었을 지난날이 왠지 그립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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