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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Feb 18. 2020

그런 양다리는 자신이 없어서요


얼마 전 번역 에이전시로부터 또 하나의 번역 의뢰를 받았다.

요즘 번역하는 동화책은 이미 시리즈로 여러 권 번역해온 책이라 내용도 익숙하고 번역 일정도 비교적 여유로운 편인데, 그걸 잘 아는 에이전시 담당자가 분량이 적은 책 하나를 같이 번역하면 어떻겠냐고 (고맙게도) 연락해온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 동화책을 번역하고 있을 때도 담당자가 만화책을, 그것도 무려 3권이나 함께 번역해보겠냐며 메일을 보내왔다.


그땐 정말 기뻤다. 와! 내가 이제 두 권의 책을 동시에 맡아도 될 만큼 인정받는 것인가, 번역 레벨이 +1 상승되었습니다, 하며 혼자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그 만화책은 내가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만화가의 책. 중국어를 한창 공부할 때 그분의 만화를 어렵게 구해다가 혼자서 공부 삼아 해석하며 낄낄거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책을 번역할 기회가 생기다니, 그분의 책에 내 이름을 역자로 올릴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웠다.


그래서 저요! 저요!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고, 운 좋게도 그 번역을 맡았다.


그 후 약 두 달간은 정말이지 보람은 있으나 힘든 시간이었다. 내 캘린더엔 두 가지 번역 스케줄로 빼곡하게 차 있었고, 오전 오후로 나눠서 해야 할 동화책 번역을 오전에 해치우고 오후에는 만화책을 번역했다. 마감일이 비슷해서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번역. 이래서 양다리는 아무나 걸치는 게 아니구나, 톡톡히 배웠다.


그나마 만화는 글밥이 적으니까(물론 글밥은 적어도 만화답게 맛깔스러운 재미를 살리려면 더 신경 써서 번역해야 하지만요 ㅎ) 내 능력으로 어찌어찌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 의뢰받은 책도 만화책에 버금갈 정도로 글밥이 적어서 양다리에 도전해볼까 했는데, ‘너무’ 스포츠와 관련된 이야기라 과감히…


거절했다.  스포츠 방면에는 워낙 문외한이라. ;;


옛날 옛적에 ‘너무’ 경제와 관련된 책을 무턱대고 맡았다가 어려워서 도중에 울며 포기했던 뼈아픈 경험이 내겐 있다. 그때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는데, 번역 실력이나 경제 지식이 부족했음에도 욕심만 많아 그 사달이 났었다. 덕분에 나는 내 그릇에 넘치는 일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되구나, 톡톡히 배웠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그릇이 커졌겠지만,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양다리로 번역하기엔 힘들 것 같아 거절했다. (그래도 의지가 있다면 악착같이 번역을 맡았겠지, 초심을 잃었어, 라고 따지신다면 할 말은 없음)


그나저나 나와 인연이 되지 못한 그 스포츠 책이 좋은 역자를 만나 멋진 책으로 재탄생되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못하거나 안 한 번역’ 폴더에 또 하나의 파일을 추가했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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