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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Apr 12. 2020

봄이 가나 봄

추억이 문득문득 찾아오는 동안


아직 새 교복(동복) 한 번 입어보지 못한 둘째 아이. 그런데 며칠 전에 아이 학교에서 하복 치수를 재러 오라는 문자가 왔다. 아니 벌써요?

아이를 혼자 보내려다가, 학교가 우째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볼일도 있고 해서 나도 같이 따라나섰다.


간만에 외출!

다정하게 아이 손을 붙잡고, 아니 붙잡으려고 했으나 다 큰 아이는 기겁을 하며(ㅎㅎ) 엄마 손을 뿌리치고, 그렇게 둘이 함께 찾아간 학교 도서관에는 담임 선생님이 마스크를 끼고 나와 계셨다. 예전 같았으면 입학식에, 공개수업에, 학부모 총회도 했을 테니 한두 번은 봤을 담임 선생님과 이렇게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처음 인사하게 될 줄이야. 온라인 수업 준비로 고생이 많으시죠, 하복을 입을 때쯤엔 진짜 개학하겠지요 등등 어색한 인사를 짧게 주고받은 뒤 치수를 재고 학교를 나왔다.


동네 서점에도 들렀다. 급하게 필요한 아이 참고서가 하나 있어서였다.

요전 글에서 내가 동네 서점은 거의 가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게 되네. 참, 사람이 한 치 앞을 못 내다본다니깐.

아무튼 어깨에 내려앉은 벚꽃 잎을 털며 서점을 들어서자, 좁은 공간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책들과 새 책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주변에 학교와 학원이 많아서 참고서를 주로 파는 서점…. 그 순간, 잊고 지냈던 추억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니까 딱 요맘때다! 지금처럼 벚꽃이 눈처럼 내리던 봄날.

친정아버지는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날을 잡아서 자식 셋을 데리고 서점 나들이를 하셨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으로! 우리는 필요한 참고서 목록을 미리 적어두었다가 그날 한꺼번에 책을 샀다. 등교할 때마다 학교 앞 서점에서 그때그때 참고서를 샀더라면, 책값을 쬐끔 높게 불러서 몰래 용돈에 보탰을 텐데… ㅎㅎ 그걸 못하는 게 한스러웠던 철부지 딸과 달리, 그날 아버지는 없는 형편에 자식 셋 참고서를 사느라 허리가 휘청하셨을 거다.


 아버지는 문방구에도 우릴 데려갔다.  학년에 필요한 공책이며 필기도구, 심지어 교과서를 싸는 투명 비닐 등등을 한꺼번에 사기 위해서였다. 나와 언니, 남동생에게는 그야말로 1년에   돌아오는 쇼핑타임 같은 ! 아버지가 데려간 곳은 아기자기한 팬시점이 아니라 도매가로 싸게 파는 가게여서 멋대가리없는 학용품들이  멋대가리도 없이 쌓여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좋아서 눈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세상에는  그렇게 예쁜 학용품들이 많은지, 게다가 내게 별로 필요 없는 학용품일수록   예뻐 보이는 건지…. 하지만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예쁜  덥석 사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고 왔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문방구가 이 서점 근처였지? 싶어서 (참고로 나는 몇 년 전 친정 근처로 이사 와서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에 다시 살고 있다) 서점을 나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문방구를 찾아보았는데, 지금은 문을 닫고 없었다.


photo by 눈큰 / Nikon D90


섭리
- 홍윤숙

피어난 꽃은 져야 하고
태어난 생명은 죽음을 예비한다
오늘도 한 송이 황홀한 꽃봉오리 속에 숨은
소멸의 섭리를 잠잠히 지켜본다
우리는 모두
지켜보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
경건히 손 모아 그 옆에 서서
망연히 고개 숙이고 서서…


그리고 집에 들어오는 길….

우리 아파트 건물 사이에 핀 벚꽃이 어느새 다 져서 바닥에 흰 점을 찍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꽃 보러 오는 상춘객을 막으려고, 저기 어떤 곳에서는 유채꽃밭을 다 갈아엎었다고 한다. 또 어떤 곳에서는 백만 송이나 되는 꽃잎을 몽땅 따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잔인한 달 4월이라지만, 꽃이 지는 것도 잠잠히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있자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꽃이 무슨 죄가 있겠어, 다 사람이 죄지.


아무튼 추억이 문득문득 찾아오는 동안 이렇게 꽃잎도 가고, 봄도 가고, 낭만도 가고 있나 봄.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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