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걸린 향수병, 보리차 한 잔에 와르르
LA 공항에 도착한 후 우여곡절 끝에 아무 택시를 잡아 탄 나는(LA 인턴 출발, 정신 차려보니 미국 https://brunch.co.kr/@snr0615/71) 택시 기사에게 임시로 마련한 숙소의 주소를 알려주고 구글 지도를 켰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혹여 이상한 길로 빠져서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온갖 걱정을 하며 이국적인 바깥 풍경을 즐기지도 못했다. 택시 기사와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갔는데 당시에도 리스닝 실력이 터무니없던 나는 동문서답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짧은 대화 후 차라리 말을 안 하느니만 못한 어색한 정적을 맞이했던 기억이 있다. 그 사람도 답답했겠지...
약 한 시간가량의 탑승 후 한인타운에 도착했는데 내 기억으로 요금이 60불 정도 나왔던 것 같다. 우버를 생각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도 요금을 듣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는데 누가 봐도 현지인은 아닌, 영어도 잘 안 되는 23살짜리는 덤터기의 먹잇감으로 아주 적합했을 것이다. 뭐라고 따질 용기도 없고 그랬다간 어디선가 리볼버가 쓱 올라올 것만 같아서 눈물을 삼키며 엄마가 챙겨 주신 돈 봉투를 꺼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돈 봉투'도 너무나 외지인의 귀여운 '서툶' 그 자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봉투 속의 돈을 한 장 한 장 세어 건넸다. 첫 시작부터 이 모양이니 지난한 1년이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지...
임시 숙소는 한인 민박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도미토리를 쓰게 되었는데 여자 4인이 묵는 방이었고 화장실이 하나 달려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내 인턴 근무지이자 LA 한인타운 내 가장 큰 커뮤니티인 '라디오 코리아'에서 바로 본격적으로 머물 숙소를 검색했다. 무조건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치안 좋은 북쪽의 아파트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남쪽의 하숙 위주로 알아보았다. 가구가 갖추어져 있는지, 밥은 주는지, 위치는 괜찮은지 등등 확인할 게 정말 많았다. 첫날은 위치를 참고해 각 집주인 분들에게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남기고는 숙소에서 보험과 같은 서류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임시 숙소에서 식사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부분 굶었던 것 같다. 혼자 밖에 나갈 용기도 없었고 거처를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쌓여있던 듯하다. 누군가 나를 등쳐 먹진 않을까 아-주 예민한 상태였다. 같은 방을 쓰던 내 또래의 여자 세 명은 함께 여행을 온 것 같았는데 놀다 왔는지 저녁에 들어와 왁자지껄 떠들었다.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 회사는 괜찮을까 집은 어떻게 구해야 하지 등의 그렇지 않아도 막막하고 피로가 쌓인 상태로 룸메이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침울해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캐리어만 봐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도착 하루 만에 지독한 향수병에 걸려버린 나란 사람...)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그다음 날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썩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침대를 새로 사야 한다거나, 밥은 제공하지만 화장실 및 샤워실이 남녀 공용이라거나 치명적으로 걸리는 요소가 하나씩 있었다. 마음이 더 조급해지던 찰나 한 곳을 더 가보게 되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노부부께서 운영하시는 곳이었다.
당시 한여름 LA의 살인적인 햇볕과 건조함 때문에 한 30분 이상을 걸어서 가니 옷이 땀에 흥건하게 젖었고 물을 아무리 마셔도 목이 타는 지경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하숙집 이모(당신께서 그렇게 부르기를 원하셨다ㅎㅎ)는 "아이고~ 많이 덥죠? 목 탔겠다. 보리차라도 줄까요?"라고 하셨다. 평소의 나였다면 거절했을 텐데 보리차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보리차 한 잔이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 9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이 생생하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보리차가 건조하다 못해 갈라진 입과 목으로 밀려들어왔다. 원효대사가 마신 해골물이 이렇게 맛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마치 딸처럼 걱정스레 봐주시던 모습과 보리차 한 잔에 마음이 열렸고 방도 깔끔하고 널찍해 보여 바로 계약했다. 주인이셨던 노부부는 물론이고 다른 방에는 각각 할머님과 또래 언니가 있어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간단한 라면이나 전자레인지 사용 외에 요리가 안된다는 점이 조금 걸렸지만, 이미 한국인의 정에 매료된 나는 개의치 않았다.
임시 숙소에서는 계약한 기간을 다 채우지 않았으니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한 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나오고 싶었던 나는 나머지 숙박 비용을 그대로 버린 뒤 다음날 바로 하숙집에 입주했다. 그리고 인턴 생활 1년 내내 단 한 번도 숙소를 옮기지 않았고 그 하숙집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주위의 같이 인턴 하던 친구들이 숙소 때문에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좋은 분들을 만난 게 최고의 행운이었고, 그 하숙집에 입주한 게 최고의 선택이지 않았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