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인턴 출발, 정신 차려보니 미국

눈물의 이별 후 도착한 미국, 입국심사부터 쉽지 않네

by 열닷새

나는 지난 2016년 8월부터 2017년 8월까지 약 1년 동안 LA에서 방송국 인턴으로 생활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칭찬을 들으며 나 잘난 맛에 살았던 시절, 내가 생각하는 나의 리즈시절이다. 동경해 오던 미국에서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울고 웃었던 일, 위험한 일에 처할 뻔했던 일, 신기한 일 등 풀어낼 이야기가 아주 많은데 약 8~9년이 지난 지금 기억이 더 흐릿해지기 전 기록을 남겨보자 싶어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었다.


해외 인턴 준비기는 지난 글 <인문계 학생의 도피성 해외인턴 https://brunch.co.kr/@snr0615/12>에서 나름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하였으니 바로 LA 도착 이후의 이야기부터 풀어내보려 한다.


이번 글은 그 첫 번째 'LA 도착기'이다.




이민 아니고 인턴입니다


부모님과 처음으로 떨어져 살게 된 나는 공항에서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이별을 했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전날 밤 간단하게 인사했고 엄마와 오빠가 배웅을 나왔다. 준비 기간이 하도 길고 힘들었던 터라 미련 없이 손을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공항에서 밥을 잘 먹고 보안검색대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더 슬펐다. "다녀올게^^"라고 말하며 줄을 서기 위해 뒤를 도는 순간 눈물이 뿌엥-하고 터져 나왔다. 의외로 엄마는 덤덤하게 "왜 우냐"고 했고 오빠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참는 것 같았다(누가 보면 이민 가는 줄).


그 직후 나는 면세점이 눈앞에 펼쳐지자마자 친구가 근무하는 곳으로 가서 선글라스를 써보고 엄마한테 어떠냐고 전화했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슬프다는 애가 인사하고 바로 쇼핑을 시작하냐'고 말씀하신다. 캘리포니아를 가는데 선글라스는 못 참지.




나 500만 원 있는 경제력 있는 사람이다 이말이야


미국에 도착하니 본격적인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영어를 못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많으니 줄을 서라는 미국인 직원의 말이 외계어처럼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갔다. 영혼도 같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혼자라는 생각에 신경이 더 예민해져 미어캣처럼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주위를 경계했다(그럴 필요 전혀 없었는데).


그러나 최종 보스는 따로 있었다. 바로 입국심사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목적으로 갔으니 ESTA만 제출하고 간단하게 '여행 후 다시 한국 돌아갈 거냐', '며칠 묵을 거고 숙소 주소는 뭐냐' 등의 질문으로 끝날테지만 나는 달랐다.


일단 준비한 서류의 양부터 어마어마했다. 인턴십 세부 내용이 적힌 초초초 중요 서류 DS-2019부터 인턴십 비자 J-1, 경제력이 넉넉(?) 하니 불법체류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용을 보여주는 약 500만 원가량(고작ㅎ)이 든 통장, 임시 숙소의 바우처 등이었다. 초대형 사이즈의 캐리어를 가져가고도 부족해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메고 있던 나는 줄을 설 때부터 가방을 앞으로 고쳐 매 이 모든 서류를 꺼내서 준비했다.


내 뒷사람들의 눈초리가 따갑게(혼자만 그렇게 느꼈을 듯) 느껴졌는데 직원은 이것저것 많이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수십 장의 종이들을 팔락 팔락 휘날려가며 입국심사 직원이 물어보는 대로 바로바로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게 IT강국의 K-속도, K-준비성이다 이놈들아(?)




그렇게 털이 잔뜩 선 고양이마냥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혼자 가자미눈을 한 채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도착했다고 가족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한국에서 미리 준비한 유심을 꺼내 교체하는데 왜 이렇게 안되는지(이럴 때 내가 참 기계치 같다고 느낀다), 나중에는 말 그대로 손이 달달 떨렸다.


근본적 의문, 이렇게 겁이 많은데 미국은 어떻게 간 거지


겨우 연결이 된 것을 확인하고 임시 숙소로 가기 위해 공항을 떠났다. 당시 나는 '우버'라는 어플이 있는 줄 몰라(ㅎ)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무 택시를 잡아 타고 택시비 덤터기를 쓰며 눈뜨고 코 베이는 본격적인 LA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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