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나빠지는 줄도 모르고
하숙집을 구한 후 첫 출근을 앞두고 있던 나는, 앞으로 생활비를 어떻게 충당해야할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초기 정착금으로 생각보다 많은 돈을 지출했고 첫 월급을 받기 전까지 부모님께서 넣어주신 돈을 야금야금 썼어야하기에 고민이 더욱 깊었다. 인턴으로서 받을 수 있는 월급과 렌트비를 계산해서 저축은 얼마나 할지 하나씩 계산해보았다. 절약의 대상이 된 것은 식사, 미용실, 병원 이 세 가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식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외식을 최대한 자제하고 회사에 도시락을 싸서 다니자고 결심했다. 식재료 시세 점검(?)차 마트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쉽겠는데?' 싶었다. 그 이유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약 5불가량의 도넛이었다. 8개 정도 들었던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많이 먹지 못했던 고열량의 음식을 이렇게 싸게 마음껏 먹을 수 있다니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 도넛을 덥석 집어 계산하고 나온 나는 아주 위풍당당하고 행복하게 하숙집 식탁에서 저녁으로 꺼내먹기 시작했다. 크리스피 도넛을 생각하며 한 입 베어문 나는 곧바로 마트에서부터의 모든 행동을 후회했다. 그야말로 설탕에 절인, 한국에서 먹던 던킨이나 크리스피에 비할 바가 아닌 정도의 단맛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혀가 마비되는 느낌이었고 하나를 채 다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산 게 아까워서 꾸역꾸역 먹고 있었는데 하숙집 이모님께서 나를 보고는 혀를 차며 한 말씀 하셨다. "아이고 저녁으로 도넛을 먹는구나. 그거 먹지 말고 밥 차려줄 테니까 밥 먹어요."
이모님의 밥을 처음 먹은 게 이 날이었는데 몇 번은 죄송스러운 마음에 거절했다가 결국 밥그릇 한가득 한국식 집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원래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었는데 그 후로 이모님은 종종 다 같이 먹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올리면 된다며 따뜻하게 챙겨주셨다.
이 경험 후로 느낀 것이 많아 앞으로는 돈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1년 후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경제 사정 때문에(아낀 것도 아니다. 카드를 미친듯이 긁고 허리띠를 졸라 맸다.) 패스트푸드나 고칼로리 음식을 많이 먹었고 건강이 아주 나빠졌다.
다음으로 줄였던 것은 미용실 비용이었다. 정말 1년 동안 단 한 번도 미용실에 방문한 적이 없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아마 인건비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로 추정중) 머리 손질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고 한다. 같이 인턴 생활을 했던 친구들이 미용실을 다녀와서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며 울상짓던 모습이 생각난다. 나는 애초에 한국에서 손질하기 편한 머리로 바꿔 내가 앞머리만 잘랐고, 뿌리 염색도 하지 않아 귀국할 때 즈음엔 거의 투톤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병원비를 아끼려고(?) 노력했다. 미용실과 마찬가지로 병원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워낙 감기에 잘 걸리는 체질이어서 한국이었다면 바로 진찰을 받고 약을 먹었겠지만 악명높은 미국 병원비 이슈를 하도 많이 접해서 꾹 참았다. 테라플루, 데이퀼, 나이퀼을 먹고 버텼다. 그 덕분에 약국이자 편의점이자 편집샵인 CVS를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사실 그래서 더 몸을 사린 것도 있다. 어딜 가나 병원비를 염두에 두며 '다치며 안된다.'고 계속 되뇌었다. 아주 큰 사고를 당할 뻔 한 적도 있지만(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아예 병원에 갈 일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귀국 후에 엄마에게 내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았다고 나름의 자랑스러움과 그 동안 힘들었다는 생색 내지는 어리광의 느낌으로 말씀드리니 "1년 동안 여행자 보험을 괜히 들었네. 보험이 있는데 아프면 병원을 갔어야지."라고 타박하셔서 순식간에 머쓱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치기어렸고 참 단순했다. 물가가 그렇게 비싼 미국에서 인턴으로 생활하면서 저축을 기대하다니. 그것도 굳이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게 아니라 나쁜 식습관을 갖고, 병원을 기피하는 등의 건강을 축내는 결정을 했던 게 무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내 바람대로 1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낸 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