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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후원자가 되시겠습니까?

예술. Part 3

by 윤지영




경리단길에서 우연찮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황금에 가까운 노란색이었다. 가을 하늘 아래 금빛으로 일렁이는 논밭보다 더 순도 높은 노랑. 하루 종일 사무실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굴리다 처음 본 하늘이라 그런지 더 기가 막혔다. 축 늘어진 내 현실과 대조되는 찬란함이었다. 당시에는 감탄만 했는데, 며칠 동안 눈앞에서 생생하게 기웃거리길래 이건 계시겠거니 싶었다. 며칠이 지나 영감에게 항복하는 밤, 나는 노란 하늘을 가지기로 했다.





하늘을 가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하늘을 그리는 것이다. 어설픈 그림을 하나 그려내고, 얼추 완성된 하늘을 내려다보았다. 잘 익은 하늘이 작은 드로잉북에 들어가 있다. 마음속에 며칠 전 하늘이 촉촉하게 성취되었다. 풍요롭다. 근데 이 종이, 뭔데 이렇게 마카가 잘 먹는 거지 마음에 들게. 그림을 물끄러미 보는데 생각이 난다. 이거 작년 미국 여행 다녀온 친구가 사다준 미제 드로잉북이다, 맞다.



이 분야 저 분야를 기웃거리던 내가 그림을 그리기로 다짐한 시점부터 그 친구는 내가 예술가 같다고 말했다. 그 한 문장이 마음을 울렸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긴 지하철이 무료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친구가 북돋은 용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미국 여행을 다녀온 친구는 드로잉북을 선물로 내밀었다. 거기엔 작은 글씨로 그림을 계속 그렸으면 좋겠다는 편지가 붙어있었다. 친구는 의지가 약한 내가 그림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래, 그랬었다. 노란 하늘 덕분에 저 멀리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후원자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노랑보다 격렬하게 살아난 그들은 내 책상 위 재료들의 출처를 꺼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가 있다. 우리는 미학적 취향이 맞는 친구였다. 막연히 예술에 대한 갈망이 있던 우리는 화요일 저녁마다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언니를 만나러 가는 화요일 퇴근길은 몽마르뜨 언덕 그 어딘가 노천카페로 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미술 재료들로 그림을 그렸고, 창작을 걸어놓았다. 그래서 화요일은 백팩을 드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언니의 아크릴 물감 재료를 쓰게 되었다. 아크릴은 덧발라도 수정한 티가 많이 안 나기 때문에 서툰 붓터치가 허용되는 넉넉함이 있기 때문에 아마추어 붓쟁이인 나에게 안성맞춤인 재료라고 할 수 있다. 남색을 덕지덕지 칠하며 그 느낌이 좋다고 말했더니 언니는 나보고 며칠 동안 쓰라며 선뜻 물감을 내어주었다. 고흐의 동생 테오가 한 것처럼. 그게 마치 나를 후원해주는 신호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나중에 아크릴 물감은 아예 내 소유가 되었고 (먹은 게 아니라 언니가 가지라고 주었다) 노란 하늘 아래 음영이 더해진 진한 초록 나무는 그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나 혼자 그린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저녁시간 동안 내 방에는 분명 나 혼자밖에 없었지만 마카가 잘 먹는 미제 드로잉북을 사준 친구, 물감을 후원해준 언니, 함께 노란 하늘을 봐준 세 친구, 그들이 함께 그려준 그림임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술가에게는 주변의 작은 마음씨, 그거 하나면 되는구나. 재능도 물질적 부요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사랑이구나. 이러니 내가 예술을 그만 둘 수가 있나.



내 예술성에 대한 주변의 지지는 갚으려고 할 때마다 파도같이 더 큰 사랑으로 날 덮는다. 늦은 밤에도 내가 책상에 앉아서 이 모든 것을 하는 이유가 되어준다. 예술은 고상한 얼굴을 쳐드는 높은 담이 아니었다. 관계와, 지지와, 따뜻한 언어가 곧 예술이 되었다. 하늘하늘 춤을 추며, 노란색으로, 그렇게 다가왔다.



그래서 항복. 그냥 그림을 그리기로. 황금빛 찬란함도 가지고, 하늘에 시도 쓰고 그렇게 사는 걸로.





p.s 미국 여행 다녀온 여명이, 아크릴 물감을 내어준 보영 언니. 고마워. 나도 당신들의 후원자가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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