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Part 2
똑똑.
가끔 스치는 모든 것들이 말을 건다. 이건 정말 부지불식간에 찾아와 손쓸 새도 없이 온몸의 감각을 건드린다. 동시에 매일 걷던 길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미묘한 변화지만 뭐랄까, 시공간을 초월한 거 같다. 갑자기 여전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 참을 수 없어진다. 불가항력적인 흡입력에 이끌려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만들지 않은 세계로 초대된다. 영감이 문을 두드렸다는 소리다.
지영아. 지금 이 하늘을 보고도 네가 출근하게 생겼니?
종이에 그대로 그리고 싶잖아. 아크릴 물감이 기다리고 있어.
머릿속에 떠오른 거 종이에 빨리 적어. 안 그럼 까먹는단 말이야.
감흥 없는 인생을 살 거야? 이건 특별한 거야.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게 아닌 걸 알잖아.
멍때리던 호수에 돌 하나가 던져져 큰 파장을 일으키듯 영감은 일상에 찾아와 예술을 깨우고야 만다.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속삭인다. 아, 괴로움의 서막이다. 예술이 일상에 문을 두드리는 게 싫다.
음, 사실대로 고백하겠다. 어떤 때는 예술이 노크하기만을 기다리던 적도 있었다. 그땐 많이 어리고 미래에 뭘 먹고살지 걱정하지 않는 때였다. 가진 것이 없어도 염려가 없었다. 그래도 글쓰기는 빈약한 현실을 꿈꾸게 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느낌을 주었고 그건 풍요로운 경험이었다.
주로 늦은 밤에 찾아오는 예술 녀석을 경건한 마음으로 맞이했다. 초침은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시간은 멈춰있었다. 온 동네에서 오직 나만 의미 있게 깨어있는 거 같았다. 슥삭슥삭. 감성을 꾸덕하게 묻혀 여기저기에 도배하듯 바르자. 희망으로 채우고 구름 위를 걷듯이 창작하자. 글이 적힌 노트는 쌓여만 가고 그림 조각들이 벽에 진열됐다. 어떤 날은 주체할 수 없어서 방 한쪽을 낙서 같은 그림으로 채우기도 했다.
그곳은 나만의 작은 전시회였다. 거기서는 잘하든 못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원근법과 지문의 구조는 몰라도 그저 하기만 하면 됐다. 새벽을 부르는 글과 그림은 때로는 격렬한 소나타처럼, 때로는 요람 위 따뜻한 온기처럼 앞을 인도했다. 예술과 혼혈 일체 하는 날은 있어야 할 자리에 정착한 안정감이 있었다. 수면시간이 부족해도 피곤하지 않은 날을 살았다.
구원과도 비슷한 예술이 찾아오는 게 마냥 반갑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뭐가 될 거냐는 말보다는 뭐해먹고 살 거냐는 말을 더 자주 들을 무렵이었으려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딱지가 붙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돈이 없는데, 우리 집도 돈이 없는데 큰일이다. 예술이 밥 먹여주냐고들 하는데, 진짜로 그래. 예술이 밥을 먹여주진 않을 거 같아. 이제 구름에서 내려와 현실을 걷자. 그러자.
먹고살기 힘들어서 알바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에 받은 아르바이트비로는 요란한 밤을 살 수 있었다. 자극적인 프랜차이즈 음식을 사 먹고 동대문에서 유행하는 옷을 샀다. 깔깔대며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밤을 이렇게도 깨울 수 있구나 싶었다. 예술은 매일 찾아오는 건 아닌데 돈이 있으면 매일을 알차게 태웠다는 느낌을 받았다. 살아보니 예술과 현실이 만나면 주로 완패하는 쪽은 예술인 거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살아보니'라는 말은 조금 무서운 말이다.
뭐, 소녀감성은 소녀 때만 유효한 거지 곧 사라질 거야. 예술이 나쁘진 않아. 사실 아직도 예술이 찾아올 때면 두근거려. 그렇지만 나는 돈도 좋아하니까 돈 많이 벌어서 살아야지. 어쩌면 예술을 하면서 나를 다 보여준다는 건 조금 부끄러운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엉성한 자기합리화로 먹고살기 힘든 예술을 부끄러워하며 방에 가둔 전과가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술이 문을 두드리는 게 싫다. 싫어야만 한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다보면 태초의 DNA부터 비난하고 앉아있다. 어째 예술 혐오는 자기혐오를 낳는 거 같기도 하다.
애초부터 스치는 모든 것들이 말을 걸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낡은 건물은 그저 낡은 건물로 남아있다면. 출근길 버스에 걸친 햇살이 꿈틀거리지 않는다면. 그러면 잘 먹고 잘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