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잘 안되는 두 여자가 말하다
한바탕 비가 쏟아진 뒤 구름 개인 오후. 카페 안으로도 비 내린 날 특유의 비릿함이 들어온다.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전에 식어버린 최근의 연애를 떠올렸다.
"얼마 전에 헤어진 걔. 나 되게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헤어졌거든. 지금 당장 감정적으로야 좋지, 근데 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라 미래가 안보였어.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통보했지. 헤어지고 나서 한두 번 걔한테 연락이 왔었어. 내가 답장을 안 하다가, 너무 절절한 거야 메일 하나가. 이건 전 남친 전 여친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답장을 해줘야 하는 게 예의겠구나 싶어서 ‘척'하지 말고 솔직한 감정을 써봐야지 하고 우선 일기에 먼저 써봤어. 근데 내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쓴 문장은 '도망가고 싶다.’ 더라고. 거기서 글 쓰길 멈췄지. 내가 이걸 걔한테 어떻게 솔직하게 전달하겠어. "
"나도 그런 적 있었어. 내가 되게 복작복작대면서 살잖아. 퇴근 후에 항상 스케줄이 있고. 그래서 피곤하다, 그런 말을 꺼내면 상대 쪽에서 자기가 내 몫까지 피곤을 떠앉겠다며, 내가 아프면 자기가 더 아프겠다 이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해. 근데 나는 그 말에 사랑보다는 지배감을 느꼈어. 그 사람은 나를 더 큰 사랑으로 감싸겠다 그런 심정으로 얘기했겠지만 암묵적으로 나를 지배하겠다는 말 같이 들리는거야. 지배. 정확히 그렇게 느꼈어."
"엄마가 자식한테 너무 헌신하고 희생하면 억압이라고 말하잖아. 원하지 않는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은 숨이 막히지."
"그 후로는 아무리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만나도 오히려 부담인 거야. 보통의 사람은 상대방이 잘해주면 더욱 사랑에 빠지고, 천생연분을 만났다, 고맙다 이런 말을 하던데 나는 이 늪같은 의존적 관계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불편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 심지어 그렇게 느끼는 내 마음을 숨기지도 못해서 상대에게 상처만 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사람은 다 영물이라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꺼라 생각하거든. 이건 뭐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도 빨리 마음이 식어버리니."
"숨기는 거 건강한 거 아니야. 안 숨기는 게 나아. 나도 안 기댈게, 너도 기대지 마, 그런 마인드의 쿨한 사랑 없나."
사실 우리는 두렵다.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감정, 사랑이 안될까 봐. 그래서 쿨 내 나는 대화로 방어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걸까?"
"사랑 자체를 믿지 못한다는 건 과대해석일 수 있고. 나는 이렇게 애절하게 붙잡아도 '그래 봤자 곧 끝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 같아. 회의적이지."
"사랑. 너무 어려워."
"서로가 호감을 가지면 N극과 S극처럼 가까워지려고 하고, 가까이서 서로를 바라보다 보면 단점이 보이기 마련이지. 그 시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사람의 이런 면을 감싸주고 싶다.' 이게 사랑인데 나는 안돼. 절대 안되는 거 같아. 단점을 감싸줄 만큼 사랑할 사람을 아직 못 만난 건지, 내가 그 능력이 아직 안 되는 건지."
"우리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생각하자. 난 가끔은 사랑 때문에 울고 웃고 그런 게 되게 자연스러운 애들이 부러워. 쉽게 사랑에 빠지고, 헌신하고 그런 애들이 부러울 때도 있어. 걔네는 그래도 진짜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만날 거 아니야. 무의식이 어떻든."
"결국은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이네. 사랑이 잘 되는 보통의 사람들."
아이러니하다. 부담스러워서 안녕을 고한 그 사람의 특성이 부럽다니. 이기적이고 못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쩌겠어. 내 마음이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데. 우리도 언젠가는 가슴이 뛰고 누군가가 보고 싶어 잠 못 이루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