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by 윤지영



휘성이가 결혼을 언급하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불현듯 내가 이런 밥상 차려줄게 했다. 순간 그가 차려주는 밥상을 생각했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주방, 차려진 음식보다 풍성한 대화가 오고 가는 식탁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헤어지기 아쉬운 밤이면 그는 내 눈을 보면서 결혼해서 같이 살자 했다. 침대에 누워서 서로 살을 맞대고 잠드는 늦은 밤. 얼마나 행복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내게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그가 좋았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인생에 몇 없는 확신의 이유가 나라는 사실 또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너무 좋아서 자꾸 물었다.


“왜 너랑 결혼해야 하는데?”

“나랑 결혼하면 재밌을 거야.”



그의 포부는 어린아이 같이 순수했고 허무맹랑했다. 이 애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그보다 어디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할까.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좋은 감정만 상상하기엔 결혼은 현실 그 자체다. 감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했다. 하지만 수면 위로 꺼내기에 결혼은 내 몸짓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어 구체적으로 대화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나는 우리가 앞날의 막막함은 잠시 덮어둘 줄 아는 위트 있는 연인이라서 좋았는데 처음으로 이런 기질이 약간 유감이기도 했다.


휘성이도 딱히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부자도 아니었다. 그때 그는 아르바이트로 10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벌고 있었다. 1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 검소한 생활비, 소박한 데이트. 약간의 적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꺾여 본질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만 사랑의 결론이 꼭 결혼만은 아니니까, 그냥 이대로 지내면 될 거라고 사고를 환기시켰다. 지금처럼 평일에 두어 번 만나서 같이 차를 마신 다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당시에는 그것 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회피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돈이 없다는 상황 탓을 불러왔다. 회사에서 점심을 사 먹는 돈도 아까워지고, 계절이 바뀌어도 옷은 살 생각도 못했다. 강박적으로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물질 소비의 근간이 되니 데이트 비용조차 부담이 되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데, 결혼은 왜 불행을 불러오나. 그의 세레나데는 나를 기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자존감을 낮아지게도 했다. 혼란스러운 양가감정이었다.



그동안 다녔던 여행들이 아까워졌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 유럽 대륙을 누비고, 아프리카를 다녀왔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물론 휘성이와 사귀고 있지 않았다. 내 인생에 결혼이 이리도 가까워질 줄도 몰랐다. 만일 그때 결혼이 이렇게 가까울 줄 알았다면, 결혼은 결국 돈이 필요하단 걸 알았다면 나는 다른 걸 선택했을까. 바르셀로나 해변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 그의 제안에 조금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그를 알아볼 수 있게 한 곳 또한 아프리카였다. 우리가 친구일 때, 팀을 꾸려 열흘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같이 간 적이 있다. 아프리카에 계신 선교사님들을 위한 수련회를 개최한다는 말에 내가 먼저 자원했고, 그가 뒤따라 팀에 합류했다. 나는 유럽여행을 다녀온 직후 백수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터라 시간이 많았고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딱히 스케줄이 없었다. 두 달의 준비기간 동안 아주 가깝게 그를 알아갔다. 휘성이가 팀에서 리더가 되고 난 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에게 줄 티셔츠와 모자, 수련회 현수막 등을 만들었다. 내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주고,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길래 그때는 단순히 그가 리더로써 나쁘지 않다는 생각만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맡아서 섬길 팀은 청소년 집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교사의 자녀들이었다. 수련회가 개최되는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해서 현수막을 걸었다. 나미비아에서, 케냐에서, 아프리카 각지에서 모인 한국 청소년들을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약 30명 정도 되는 청소년을 만날 수 있었다. 까만 흑인들 사이에서 돋보일 정도로 하얀 아이들이었다.



마냥 착해 보이는 표정 안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숨어있는 듯했다. 부모님은 헌신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 왔다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하루아침에 친구들과 생이별한 격이었다. 낯선 나라의 소수민족이 된 아이들은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나와 같은 조였던 초록이는 반 친구들에게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결정권 없이 타지에서 살게 되는 것이 어떤 건지 들으면서 울고 웃고 밤을 지새웠다. 우리 땅이 아닌 곳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심었다.



어느날은 케이프타운 인근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점심식사 후 각자 얼마의 자유시간을 보내고 버스로 집합하기로 했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해야 하는데 버스에 한 좌석이 비어있었다. 휘성이 자리였다. 그가 공터에도 없고 교회 뒤뜰에도 없었다.



일행들은 휘성이 교회에서 울며 기도하고 있는 거 아니냐면서 그를 놀려댔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하면서 잘 우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가 어딨는지 궁금했는데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창문 밖으로 그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로 한국인 십대들이 졸졸졸 쫓아왔다.



휘성이가 막 버스에 오르니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상에, 나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그 아이들이 창문밖에서 손을 흔들며 버스를 따라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오래 알던 형이 떠나는 것 마냥 도로를 넘어서까지 달려왔다. 그를 배웅하는 몸짓엔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있는거 같기도 했다. 휘성이는 창문을 열고 이제 그만 가라며 외쳤지만 아이들의 뜀박질은 얼마간 계속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런 신파적인 장면이라니. 날은 아직 훤했지만 왜인지 저녁 노을같은 풍경이었다.



“휘성아. 아는 애들이야?”

“아니, 오늘 처음 봐.”

“너 뭐하다가 오는 건데? 쟤네랑 뭐 했어?”

“그냥 얘기했어. 여기서 사는게 어떤지. 요즘 관심사가 뭔지, 그런거.”



휘성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과 친했다. 피부가 하얗던 검던 간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는 툭툭 던지는 말로 사람의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었다. 이 애는 어떤 힘이 있을까. 어떻게 짧은 시간에 이리도 애틋한 감정을 저 마음들에 심었을까. 두피조차 다 벗겨질 만큼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저 친구이기만 했던 그가 처음으로 다르게 보였다. 휘성이 이름의 뜻은 빛날 휘에 별 성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그저 그래 보였는데, 여기서 그는 정말 이름처럼 빛이 났다.



어쩌면 그때 나는 막연하게 그와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했던 거 같기도 하다. 낯선 곳에서도 낯설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미래를 함께 할 수도 있겠다고.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이 뒷받침 되어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인 생각이었는데 정확히 1년 뒤, 상상이 실체가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거금을 들여 아프리카 대륙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전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쭉 친구일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여태까지 다녔던 여행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의 선택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 관계도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