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스쳐갔을 어렴풋한 감정들
오늘 아침엔 블루종을 걸치고 나갔어. 짧은 치마도 입었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매번 그렇듯 지하철 역에서 내려 우이천을 따라 집까지 걸었지. 걷다 보니까 치마가 자꾸 올라가서 블루종을 벗어서 허리에 묶었어. 반팔만 입은 맨살에 시원한 바람이 간질간질 들어왔어. 그렇게 걷는데 감수성 깊은 음악은 이어폰에서 계속 나오고, 지금 이 순간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더 걷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만 들었어.
시계를 봤어. 내가 더 많이 걷는다면 글을 쓸 시간이 줄어들고 내일 출근길이 힘들 거 같아서. 그러면 10분만 더 걷자. 이 다음 다리가 5분 뒤에 나오니까 거기까지만 걷고 집에 들어가는 거야. 머릿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시야를 옮기는데, 우이천에 왜가리가 있더라. 두 마리가. 나는 항상 한 마리만 봤거든. 오리는 떼를 지어서 다니는데 걔는 혼자만 다녀. 하얗고 얄쌍해서 고상해 보이긴 하는데 외롭겠다, 그러고 말았었는데 오늘은 똑같이 생긴 애가 두 마리가 있었어. 근데 걔네가 춤을 추고 있는 거야. 아 이상하다? 밤이 돼서 되게 신났나 보다, 혹은 짝짓기를 하나? 생각했는데 자세히 지켜보니까 싸우고 있는 거더라고.
근데 날개가 크고 몸짓이 크니까 그게 춤처럼 느껴졌어. 지들끼리 서로 눈치 보다가 돌격하고. 날라다니고. 격렬하게 싸웠어. 그걸 보는데 난 너무 웃긴 거야. 과연 도심에서 두루미가 싸우고 있는 걸 밤 11시 반에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되게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비록 서울 끝자락에서 자라서 강남 한복판에 출근하는 게 꼬박 한 시간씩 걸리고 힘들지만, 이런걸 볼 수 있구나. 감사했지.
곧이어 후각에 집중하니 풀내음을 맡았어. 도봉구는 우이천을 막 아기자기하게 꾸미지는 않아. 그리고 고작 인간이 길게 늘어진 자연을 어떻게 관리하겠어. 우이천이 지금 녹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하고 그래. 꽃들도 많이 있는데, 거의 시들긴 했지만. 금국화가 많이 시들었더라고. 근데 무성한 녹음이 내가 작년에 경주 혼자 여행 갔을 때 그 밤을 떠올리게 하는 거야. 그러면서 아 난 또 여행을 가야겠구나. 내가 작년에 혼자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그 용기가 없었다면 이 풀냄새가 그냥 풀냄새였겠지. 이 푸른 냄새를 맡으면서 내가 다시 여행을 가야 하고 또 한번 성장해야 되는 기회라고는 생각 못했겠지. 5분을 걸으면서, 내가 지금 창작욕심이 있고 그래서 퇴근 하고 나서도 항상 무언가를 하기 때문에 피곤한 이 모든 것이 운명이구나. 나는 이런 거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우이천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남들보다 더 기뻐할 수 있고, 더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는 이게 내 삶이구나. 그래서 오늘 밤에 되게 총체적으로는 기분이 좋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나는 씻는 것도 되게 좋아하고 뽀송뽀송한 거 좋아하는데 그것보다 이 감정을 먼저 정리해야겠어. 나는 느끼는 게 빠른 만큼 빠르게 까먹기도 하니까. 나이가 들어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