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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의 무게만큼 가벼운

누나 '남소' 받을래요?

by 윤지영

"대학교 때 같이 몰려다니던 애들이 있었어. 우린 남자 셋, 여자 셋으로 다녔었거든. 최근에 그 남자애들 중에 한 명한테 연락이 왔어. 자기 친구 소개받을 생각 있냐고. 그 남자애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려. 간만에 걔를 통해서 '남소'라는 단어를 들었는데 그게 너무 귀여운 거야. 나 남자친구는 없는데, 소개받을 생각도 없다 하긴 했지."


"아 귀엽다. '남소'라니."


"그치. 그런 단어는 스무 살 때나 썼던 거 같은데 아직도 애들이 쓰더라?"


"남소 받아보지 그랬어. 너 솔로 기간도 좀 됐고, 매력도 있으니까 반응 괜찮을 거 같은데!"


눈 앞에서 턱을 괴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서 진심으로 한 소리. 특히나 그녀의 긴 생머리와 계란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갸름한 얼굴형이 대박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론적으로는 거절하긴 했다? 근데 내가 비교적 유연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니까 대뜸 친구라는 애 사진을 띡 보내면서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더라. 걔네는 나보다 두 살 밖에 안 어린데 왜 그렇게 하는 짓이 순진무구한 거니. 아무튼, 요즘 애들은 그렇게 사진 하나에 호감을 가지고 만나고 일희일비할 생각을 하니까 단순하다 싶으면서 부러웠어."


"요즘 애들이라고 하니까 진짜 노인 같은 거 알지? 너도 요즘 애야. 도대체 너 말하는 거 보면 너 안엔 칠십 묵은 할머니가 우두커니 앉아있는 거 같다."


"세상 다 산 할머니보다 더 근심 걱정이 많아서 그래 내가. 나는 당장 월세값 내야 되고, 또 현실에 치어 빛을 잃으면서 살긴 싫으니까 빠듯하게 모아 여행도 다녀와야 하고. 자기계발이랍시고 새벽에 영어반 다니고 주말엔 클래스 등등 다니는데 내가 누굴 소개받아서 솔로보다 외롭게 만들려고. 그냥 솔로여서 외로운 건 그렇다 치는데, 연인 중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바빠서 나머지 사람이 외로운 건 더 비참해."


"으. 비관적이지만 동감해. 그래도, 연애를 하면 일상의 신성함을 알게 되지 않아? 나는 연애를 하면 -일시적이긴 하지만- 월요일도 피곤하지 않더라니까. 눈 뜨자마자 지옥 같은 회사로 가는 것보다 이 사람이 뭐라고 아침 인사를 했을까 그걸 더 먼저 생각하게 되니까 말이야. 지하철에서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들도 그 사람 생각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그런 것들. 그건 확실히 사랑이 주는 경미한 마약이야."


"그거 좋지. 나도 느꼈던 적 있고. 헌데 더 이상의 설렘도 이제는 잘 모르겠어. 연애가 나에게 잠깐의 만족을 주는 건 인정. 에로스적인 감정도 인정. 근데 환경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내가 가지고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눈 뜨자마자 출근해서 뭐 할지 이번 달 공과금은 빠져나갔나 그런 생각하는 걸 뭐."


"그만 말해. 너무 슬퍼. 몽글몽글한 단어는 쏙 탈수시키고 현실만 욱여넣은 거 같다. 인간의 인생의 기쁨이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서 온다고."


'남소'가 가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침범하기엔, 이십 대 후반 직장인 여성 이라는 사회적 타이틀은 너무 무거운 것이었다. 그렇게 깃털처럼 가벼운 '남소'는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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