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라고 하기엔 마음에 너무 많이 남은
"난 가끔 그 애한테 화가 나. 이제는 서로 어떻게 사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도 그 애가 아직도 내 감정에 영향력을 끼치는 게 느껴지면 기분이 가라앉아."
"아이고. 그렇구나. 요즘 별 말 없길래 이제 괜찮아진 줄 알았지. 헤어진지 얼마나 됐어?"
"지금이 10월이니까... 일 년 조금 안됐네. 그 애와 함께했던 4년 하고도 7개월, 아 초반에 아니다 싶을 때 그만뒀어야 하는 건데 뭐 그렇게 오래 만났지? 요즘 들어 갑자기 감정이 밀려오는 날엔 화가 나서 그 시간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가도 내 가장 예뻤던 시간을 공유한 사람이니까. 그런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 그냥 이 지경이 되도록 걔랑 만나온 나 자신에게 화도 나고. 앞으로 내가 그 사람을 잊어낼 수는 있을까 싶다. 요즘은 진짜 그런 생각에 빠져 살아."
"너는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만났어?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걔는 인성이 그렇게 좋지도 않고. 자기 일에 열심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너에게 무심했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가 헤어짐을 결심했던 거고. 지금도 이런 생각은 들어. 헤어지고 난 뒤 시간들을 거지같이 보냈잖아 내가. 맨날 술 먹고 걔 찾는 건 다반수고, 앤드라이브 들어가서 그 애와 함께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1년 2년 3년 4년을 수백번 훑어보고... 하필 막학기에 헤어져가지고 졸작도 다 말아먹고 그치. 맨날 폐인처럼 다녔잖아. 거식, 폭식, 그러다 탈진 오고."
"개폐인. 개민폐였음. 이러다 애 하나 망가지는 거 아닌가 했다 정말. 그래도 이제 정상궤도야. 이 정도면 많이 멀쩡해졌어."
"근데 웃긴 게 내가 헤어지자 해놓고 내가 난동 부림. 암튼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내 옆에서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어떤 건지, 그게 나한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잘 알겠더라고. 그 애가 나한테 한 행동들은 응당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행동은 아니었던 것도 알겠고. 뭐 걔도 살아온 날의 사연이 있어서 나한테 그랬던 거겠지. 근데 말이야 내가 드는 생각은, 헤어져서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걔가 이렇게 안 잊혀질 줄 알았다면 계속 만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누구나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데 그냥 걔는 나한테 저스트인 사람이진 않았을까. 혹은 내가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해서 걔가 소진된 상태로 나를 만났던 건 아닐까."
"왜 자학을 하고 그래. 너는 할 만큼 충분히 사랑했어. 이건 너도 알고 걔도 인정하고 나도 보장하는 사실. 팩트 오브 팩트."
"나도 모르겠어. 이미 난 이 부분을 이성적으로 생각할 힘이 상실된 거 같아. 이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 번 그 생각의 반복이야. 결론이 없는."
나는 그녀를 많이 아끼고 좋아한다. 그 애가 사랑을 하고 있었을 땐, 정말이지 찬란했다. 사랑이 사람을 이렇게도 한계 없이 확장시킬 수 있구나. 그리고 그만큼 어마어마했던 사랑이 떠나가면 사람이 이렇게도 되는구나. 지금도 그녀는 총명하고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 영민한 친구다. 그러나 이 부분을 들춰내면 유독 연약한 그녀가 나타난다. 마음이 아프다.
"있잖아,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얀 천이 있어. 거기에 아주 선명한 색이 지속적으로 칠해졌어. 근데 자타의 적으로 이제 더 이상 그 색을 못 칠하게 됐어. 다시 색을 빼라네. 천을 물에 담가도 보고 삶아도 보고 다른 색을 칠해봐도 원래의 하얀 색으로 돌아오지는 않는 거야. 너무 깊게 스며들었으니까. 색이 입혀진 시간의 배가 지나야 조금 빛이 바래 지는 정도. 흰 천은 대신 다른 색의 모습으로 남겠지. 하얀 것도 아닌, 칠해진 색도 아닌 제 3의 색으로.
너도 이 흰 천과도 같은 거라고 생각해. 너라는 사람에게 그 애가 사랑으로 다가와서 오랜 시간 강렬하게 덧입혀지고, 그 애와 융화되는 너 스스로를 너가 사랑했고. 그러다 그 애와 헤어지면서 전인격적으로 수용했던 사랑이 단절되고, 색의 공급이 중단되고. 아무리 빨아봐도 그 애와의 추억은 안 지워지는 거지. 게다가 그렇게 잊기 힘들다는 첫사랑이었잖아. 그래서 너가 많이 힘든거야. 네 일상에도 그 사람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겠지 아직."
"응. 많이 있더라..."
"네가 아무리 다시 흰 천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아무 일이 없었던 예전처럼은 안될 거야. 대신 너는 낡고 버려진 흰 천이 아니라 사랑을 했었고, 사랑을 할 줄 아는 멋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지. 이 시간들을 오롯이 보내고 나면 세월의 흔적이 담긴 더 깊고 다채로운 사람이 될 거야. 고통도, 낙담도, 슬픔도 훌륭한 감정라고 생각해 나는. 너를 부정하지 마. 너는 그 애를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저 사랑을 했던 사람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