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테스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무렵부터 왜인지 가는 길목마다 필라테스 간판이 보였다. 이번 달까지 등록 시 50% 할인이라는 입간판이 은근하게 유혹을 걸어왔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책을 내겠다고 여러번 결심했다. 그때부터 출간했다는 작가들의 인스타그램이 피드 추천목록에 올라왔다. 관심사가 반영되니 뇌가 사물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필라테스를 등록하지 않았고 책도 내지 못했다는 점이 내 인생의 비극이자 희극이었다.
요 근래 최대 관심사는 결혼 준비다. 평생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는 것은 희극이었으나 돈이 없는 것은 비극이라서 그 무렵 자주 감정의 양극단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결혼을 결심하고 보니 주변에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곁에는 유별나게 부유한 이들이 없어서 그들도 나와 비슷한 예산으로 결혼을 준비할 터였다. 물론 그중에 우리의 예산이 압도적으로 적을 것이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면 어디에 얼마큼의 돈을 쓸지 우선순위를 효율적으로 설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커플은 경제 원리는커녕 저축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했다. 만날때마다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한창 결혼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생활력은 나보다 어른이어서 존경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결혼식이 한 달 여 밖에 남지 않아 준비할 것이 많을 텐데 선뜻 시간을 내주는 것이 고마웠다.
평일 저녁, 가로수길에서 접선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드레스 때문에 다이어트를 해야 할 테니 식사는 생략하고 카페를 가자고 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며 멕시코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부터 생소한 빠히타는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새우 등을 또띠아에 싸 먹는 멕시코 현지 음식이었는데 체중조절하는 예비신부의 저녁식사라기엔 칼로리가 대폭발 하는 건강식이었다. 남미의 식문화는 도통 익숙해지지 않아서 나는 또띠아를 싸다가 육즙이 팔꿈치까지 줄줄 흐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친구의 또띠아는 너무 과한 내용물이 올라간 바람에 가운데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면 속에서 우리는 상견례에 대해, 신혼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와중에 친구가 꿀팁을 몇개씩 흘렸고 나는 열심히 주워담았다.
빠히타 그릇을 완전히 비우고 나서야 카페로 향할 수 있었다. 친구는 갑자기 살을 뺀다며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조금 전 식사하던 기세와는 다른 결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친구가 먼저 운을 뗐다.
- 아니, 언니. 그래서 돈이 얼마나 없길래 그래?
역시 그녀는 전문가였다. 실질적인 문제로 대화의 흐름이 넘어오자 제일 먼저 예산부터 물었다. 내 사정을 알고 있던 친구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 하며 물어왔을 말에
- 나 200만 원 밖에 없어...
라고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는데 왠지 나의 무능함을 오픈하는 것 같아 작아졌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그녀가 잠시 침묵함으로써 내가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좀 그렇지 않은가. 드레스 가봉을 앞두고 양껏 식사를 하고, 모아둔 돈을 털어서 염원하던 것을 실행할 수도 있지 않은가.
200만 원밖에 없는 것도 나. 좋은 친구와 풍족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나. 아직 필라테스를 등록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시작할 나. 느리지만 꾸준히 글을 쓰는 나. 매 순간 스스로가 되기 위해 솔직히 살았던 나인데, 이건 돈보다 자존감의 문제였다. 자학적인 태도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결혼을 앞두고 충분한 예산을 모아놨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인생을 잘못 산 것은 아니니까.
- 언니 진짜로 주변에 결혼한다는 사람 중에 언니가 돈 제일 없네. 언니 그럼 이거 알려줄게.
내가 돈 없는 척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진짜 돈이 없는 것을 파악한 친구는 모바일을 켜 네이버 카페에 접속했다. 그 후로 들은 친구의 말은 나에게 거의 구원의 종소리와도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결혼하냐고 하지만 요즘 세상은 잘만 찾아보면 결혼을 돕는 제도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본인이 활동하고 있다는 카페를 소개시켜주었다.
물론 나도 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론 오히려 워킹(웨딩플래너를 끼지 않고 예비부부가 직접 스, 드, 메 등의 회사와 직계약 하는 방식)이 더 비싼 구조여서 의아하던 차였다.
친구가 알려준 카페는 거품 뺀 가격의 스드메 및 각종 결혼 준비 상품을 예약할 수 있는 곳이었다. 드레스와 메이크업만 해도 내가 개별적으로 알아본 견적보다 100만 원 이상 저렴해서 놀래버렸다. 어떻게 이런 구조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기존 방식은 웨딩플래너가 동행하며 여러 필요를 돕는 것이 보편적이다면 이 곳은 플래너가 업체를 선정해 계약만 체결해주는 비동행 시스템이라 인건비가 줄어들어 단가가 낮아지는 거라고 했다. 대신 예비부부가 업체에 방문해 직접 진행절차를 밟아야 해서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사실은 카페에 업체별 후기를 작성하면 포인트가 쌓여 활동한 만큼 페이백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카페에 출석해 하루에 댓글 10개 달면 1,000원 포인트 적립
웨딩드레스 투어 후기 남기면 10,000원 지급
상견례 후기 남기면 5,000원 지급
결혼식날 후기 남기면 10,000원 지급
이런 포인트 항목이 수십 개는 돼보였다. 이거 신혼부부 등 처먹는 신종 사기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친구는 이걸로 결혼 준비 0원에 한 사람도 있다며 그들의 후기를 보여주었다. 카페에는 이미 몇십만명의 예비신랑신부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다수가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에서는 회원수가 진실을 보장하는 듯 했다. 친구는 후기를 세세하게 쪼개서 작성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댓글을 달면 못해도 40만 원 정도는 돌려받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있었다. 그건 확실한 길을 개척한 선구자의 눈빛 같기도 했다. 요즘 그녀의 하루 일과는 카페에 접속해 글을 정독하고 댓글을 다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어쩔 때는 결혼을 하는 건지 홍보 알바생이 된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저 멀리 대륙을 발견한 선원의 심정이 이러할까. 나에게 결혼은 단순히 로망을 실현시키는 수단이 아니었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처절할 정도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돈이 없다는 것은 약간의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것일 수 있겠다. 예산을 아낄 수만 있다면 댓글의 노예가 되는 것,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 정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명은 있고 돈이 없어도 결혼을 할 수 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며 카페 회원가입을 했다. 스튜디오 촬영대신 친구들이 결혼사진을 찍어주기로 했으니 나는 드레스와 메이크업만 계약하면 될 것이었다. 대충 알아보니 견적이 백만원 초반대로 추정되었다. 심지어 200만원 안에서 해결이 된다!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손아귀에 꽁꽁 감췄던 것을 편 순간, 그게 사실 별거 아닐 때가 있다. 그것도 모르고 전전긍긍했던 과거의 지영이가 가엽다. 앞으로의 길은 찬란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그녀가 덧붙인 말들을 상기시켰다. 종아리와 겨드랑이 제모는 결혼 전에 해놓는 것이 좋다고. 자기도 카페에서 얻은 팁이라고 했다. 내일 피부과에 연락해 견적을 알아봐야겠다. 역시 오늘도 그녀는 삶의 진리를 알려주었다. 돈이 없어도 친구 하나는 잘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