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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발치했다.

무려 두 번째 사랑니를.

by 윤지영



6년 전 기억을 되살려본다. 잇몸이 쿡쿡 쑤셨다. 사랑니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기존에 있던 어금니 자리를 미는 탓이었다. 당시엔 사랑니를 뽑는다는 것이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지 몰랐다.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당장 빼버리지 뭐 하며 집 근처 치과로 가 사랑니 발치 접수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패기였다.


오른쪽 잇몸에 간단한 마취를 했다. 얼얼하게 감각이 없어지는 오른쪽 볼과 입술을 만져봤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감각이 없어지는 경험조차 신기했다. 마취가 완벽해지니 의사 선생님이 오고 몸이 체어에 눕혀졌다. 드릴과 석션이 입 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잠시 후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커다란 사랑니가 두 조각으로 깨어져 하얀 냅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게 나의 첫 사랑니 발치였다.


‘생각보다 별거 없네’라고 혼잣말을 내뱉은 지 두 시간 만에 나는 방구석에 누워 나라를 잃은 것처럼 통곡을 했다. 마취가 풀리니 진짜. 진짜로 너무 아팠다. 워낙 몸 사리며 살았던 덕에 별 다른 사건사고가 없던 내게 사랑니 발치는 인생 최고의 고통이었다. 누가 해머로 입 안을 빵 때린 거 같았다. 그칠 줄 모르는 통증에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게 서러웠다. 사랑니가 나야만 하는 내 유전자, 나를 만든 엄마 아빠, 하나님까지 다 미웠다.


피범벅이 된 거즈와 부어오른 볼, 그런 것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입 안에서 하루 종일 피비린내가 났다.


친구들은 지영이가 어른이 된 거라고 말했는데, 울상을 지으며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왼쪽에 사랑니 하나가 더 남아있다는 걸.








그렇게 6년이 지났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았고, 나에게는 아직 왼쪽 하악의 사랑니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얼굴을 거의 다 내민 사랑니는 하필 매복치여서 인생 편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사랑니와 어금니 사이에 자꾸 이물질이 껴서 어금니가 썩고 있었다. 그래도 난 두려운 거지. 6년 전 겪은 고통 때문에 사랑니를 뺀다는 게 무언지 아니까. 그 무렵 지인이 사랑니 발치를 했다. 발치 과정에서 썩은 사랑니가 자꾸 부서져 수술시간이 길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잇몸 절개도 많이 했고, 볼도 이만큼 부은 거라고. 정말로 한쪽 볼이 복어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아. 더 이상 고통을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회피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더 큰 고통이 뒤따를 판이었다.


감사하게도 6년 전과 6년 후의 내가 바뀐 점은, 인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 고통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뒤에 따라올 성숙을 기다리는 것뿐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랑니를 발치하면 당장의 고통만 감수하면 되는데, 고통이 두려워 미루고 미루다 보면 후에 더 큰 고통을 안게 될 뿐이다. 지금 고통을 감내하느냐, 잠시 뒤에 더 큰 고통을 겪느냐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인간은 언제나 고통을 회피하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사고, 행복한 인생을 외치며 고통을 외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고통은 인간에게 불가항력으로 매달려있어, 피하기만 하면 복리이자처럼 늘어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6년 전에 그걸 몰랐던 나와 6년 뒤 그 사실을 삶으로 겪은 나는 똑같은 사랑니를 뽑는 사건 앞에서 조금은 달라져 있다.







7월 14일 오후 7시, 치과에 들어가서 8시 반에 나왔다. 왼쪽 볼은 얼음팩으로 감싸 쥐고 거즈를 꽉 깨물었다. 잘 참았다고 의사 선생님께 칭찬도 들었다. 약국에서 약을 받고 집으로 향한다. 마취가 서서히 풀리면서 고통이 밀려온다.

사랑니는 사랑을 알게 되는 18-25세 사이에 나기 때문에 사랑니라고 불린단다. 진정한 사랑은 마냥 핑크빛이지 않다. 서로를 깨트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과정에서 참 많은 전쟁과 고난이 동행한다. 오늘 밤 나에게 ‘마치 사랑처럼’ 고통의 세계가 열릴 테지만 이렇게 또 한 번 나는 어른이 될 것이다.


물론 어른도 눈물은 흘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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