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의 조건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책을 참 많이 사주었다. 유명한 소설을 모은 세계전집이나 일러스트가 예쁜 동화책 등을 책장에 가득 채워주었다. 그 책들이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우리집 수입보다 조금 더 비쌌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덕분에 이상적인 엄마와 현실적인 아빠는 꽤 다투었다. 부모님의 다툼의 깊이를 알지도 못하고 굳이 알아야될 나이도 아니었던 나는 엄마가 선사한 책의 세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치 구름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나에겐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서 최신 유행했던 퀵보드 보다도, 골목을 정복한 롤러스케이트보다도 책이 주는 세상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열두 달을 담당하는 열두명의 요정이 나오는 동화를 읽었다. 그 동화는 열두 개의 다른 세상을 알려주었다.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럴때마다 어떻게 다양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말해줬다. 또 요정들이 입고나오는 열두개의 다른 드레스는 왜 전부 아름다운지. 마지막 잎새는 나에게 이별의 슬픔을 알게 했다. 죽음의 쓸쓸함을 가르쳤다. 그러나 인간이 희망을 품으면 인생의 끝을 보다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책은 글자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했다.(그러나 아직도 나는 노년의 인생이 두렵고 슬프다.)
또 가슴 찢어지게 안타까운 동화도 읽었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노처녀 사장은 매일 아침마다 바게트를 사러 오는 남자를 짝사랑하게 된다. 남자의 행색이 남루한 것으로 보아 형편 때문에 맛있는 빵을 사지 못하는 것이라고 짐작한 여인은 어느날 몰래 바게트 안에 크림을 듬뿍 발라 그에게 건낸다. 그는 매일 그랬던 것처럼, 바게트 봉지를 받아 베이커리를 나갔다. 여인 혼자서 핑크빛 미래를 그리던 행복감도 잠시, 이내 새빨개진 얼굴로 베이커리에 찾아와 화를 내는 남자! 스토리가 그렇게 전개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알고보니 그는 건축 설계도면을 그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딱딱한 바게트를 지우개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사랑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줄 알았던 크림은 그의 설계도면을 뭉개버렸고, 여인의 사랑도 뭉개버렸다. 매일 아침마다 설레하며 예쁜 옷을 차려입던 여인은 다시 그 옷을 벗는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화를 읽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책은 초1짜리 꼬맹이에게 사랑의 비극도 알려주었다. 이제는 동화책들이 우리집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동화의 제목을 알아낼 수 없다. 혹시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이 동화의 제목을 안다면 댓글로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아무튼 동화가 주는 풍부한 인생사를 읽으면서 자연히 나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도 하는 글의 매력에 빠졌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고 끝맺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면.
조금씩 글을 썼다. 처음은 애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를 모방한 소설을 썼다. 다소 암울했던 첫소설은 악행을 일삼는 주인공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내용이었다. 뜨거운 지옥의 용암 묘사까지 단숨에 적어 내려갔다. 엄마와 이모는 내 글을 보고 칭찬해주었다. 지영이는 작가를 하면 되겠다고 했다. 그 말이 나에게 시금석이 되어주었던거 같기도 하다. 중학생이 되던 시절엔 인터넷 소설이 유행했는데 그래서 나도 인터넷 소설을 썼다. 이모티콘은 쓰지 않겠다는 작가부심으로 주인공의 탁월한 심리묘사와 남자주인공과의 팽팽한 러브라인을 속도감 있게 연재했다. 나름 재밌게 써서 온라인 팬도 몇명 생겼다. 그러나 은근히 상상력이 딸렸던 나는 완결을 내진 못하고 그 쯤에서 인터넷 소설 작가의 길을 접고 만다.
그 후로도 계속 책을 읽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주욱 읽고, 기욤 뮈소의 판타지 로맨스 소설도 시리즈별로 섭렵했다. 나이를 조금 먹으니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 알랭 드 보통의 사랑 3부작,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읽었다. 그러다 어느날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문득 좋은 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대가의 글은 인간의 찌질함을 다루었다. 그리고 그 글은 교과서에도 실리는 좋은 글이 되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이고 나서 추악한 내면의 갈등을 섬세하게 고백했기에 그 소설은 러시아의 자랑스러운 고전이 되었다. 알랭 드 보통이 스무살 적부터 연재한 사랑 3부작(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우리는 사랑일까-키스 앤 텔)에서 그는 연인 앞에서, 사랑 앞에서 찌질한 자신의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 모습은 심지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돈키호테는 뭐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탑 오브 찌질이고.
글을 쓸때 물론 상상력과 필력도 중요하지. 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끌어나가는 인내심도 훌륭하지. 그러나 읽는 자로 하여금 심장을 파고 들게 하고 머리를 댕- 하게 맞은 거 같은 충격을 주는 좋은 글은, 반드시 인간의 수치심, 두려움, 불안 그런 것들을 다루었다. 특히 본질은 수치심이었다. 좋은 글들은 수치심을 어디까지 글로 옮겨적을 수 있는지를 앞다투어 경쟁이라도 하는 듯 했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나의 글을 읽어보았다. 나의 글에는 희망과 포부가 있었다. 낭만도 존재했다. 그러나 두려움과 찌질함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여태까지 많은 습작 중 수치심에 대해서 나는 단 한자도 적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한 순간, 처음으로 글쓰기에서 패배감을 맛보았다. 강력한 카운터펀치에 내 글부심은 맥을 못추리고 넉다운했다.
수치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 이다. 글에는 반드시 작가 자신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만과 편견의 스토리가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은교를 쓴 박범신 선생과 이적요 시인을 동일인물로 그려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포기했다. 절대로 나의 수치를 드러내지 못할 거 같았다. 부모님의 불화를 적을 수 있을까? 아니. 초1때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한명만 온 일을 쓸 수 있을까? 아니아니. 남자친구가 전에 사겼던 여자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술퍼먹고 그에게 전화했던 찌질한 얘기들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니아니, 아니라고. 못 말한다고. 살면서 겪었던 사건들보다, 사건을 겪어낸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쓰기가 더 무서웠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글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며 나의 글에서 창조하는 수치는 곧 나의 수치기에, 나는 겁쟁이처럼 글의 세계에서 도망쳤다.
근데 또 나를 드러내는 욕구는 여전히 해소하고 싶은 욕심쟁이였던 나는, '수치의 나'말고, 멋지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패션’이라는 수단을 제 2의 진로로 삼았다. 나는 패션을 좋아하는 거 같다며, 나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합리화를 하며 화려한 그 세계에 발을 담궜다. 그리고는 글을 잊었다.(가끔, 싸이월드에 감성글 쓸때만 꺼냈다.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 친구를 빽 삼아 세상과 맞짱뜬다 같은.)
그렇게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했고 전공을 살려 취업을 했으며, 오래 오래 길을 돌아와 결국 지금 나는 다시 글을 쓴다. 브런치에 필명으로 연재한다는 건 글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변화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나의 자아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지만, 그 동안 살면서 수치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조금 생겼다.(아주 조금.) 그리고 그 용기를 여기에 계속 기록할거다.
어느 정도 수치심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나의 글은 자기애가 너무 많고 있어보이는 척을 남발한다. 그러나 안되는 부분을 인정하고 여전한 방식으로 꾸준히 쓰는 것. 그것만큼 좋은 글쓰기는 없는 거 같다.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러니 더는 도망가지 말고 꾸준히 쓰자 지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