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쓰지 못했다
오늘은 3.1절이다. 선약이 있었고 몸은 좋지 않았다. 약속을 취소하고 늦잠을 잤다. 오후쯤 일어나서는 언제 다시 여유 있는 시간이 올지 모르니 쌓아두었던 일들을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방 청소, 책 정리, 부탁받은 약간의 디자인, 써야 하는 글, 쓰고 싶은 글이 있다. 특히 사랑에 대해 혹은 이십 대에 대해 쓰고 싶었다.
글로 할 말이 많았다. 글을 쓰려고 자리를 잡으면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할 거 같아서, 청소부터 시작한다. 그간 다녀온 여행지에서 받은 팸플릿, 티켓, 동전 등을 분류하고 정리했다. 홍콩의 2달러 동전 쉐입이 우아하다. 작년 여름에 인화한 필름 사진도 나왔다. 친구들이 보내준 엽서도 한 군데에 모았다. 감명 깊게 본 전시 카탈로그는 오늘도 버리지 못하고 쌓여만 간다.
내 방 청소만 하기 좀 그래서, 온 집안에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가사일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빨래 개기도 했다. 보송한 새 수건과 푸석한 오래된 수건을 차곡차곡 개켜서 화장실에 넣어두었다.
청소를 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방 상태는 마음의 상태를 대변한다던데, 겨울 동안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정리된 기분이다. 산뜻한 기분으로 글을 써야지. 자리에 앉았다.
아, 글을 쓸 땐 몇 시간이고 집중을 하니까 필요한 것들을 주변에 가져다 둬야겠다. 커피를 내리고, 짧은 영감을 기록한 노트와 일기장을 가지고 왔다. 무지에서 산 잉크펜도. 필기감이 좋은 펜이다.
갑자기 펜을 쓰고 싶어 진다. 글을 쓰는 것과 편지를 쓰는 것은 묘한 동질감이 있다. 형제 같달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 친구가 편지를 읽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진짜 글을 써야지. 아끼고 있던 선물 받은 캔들에 불을 켰다. 일종의 의식이다. 캔들을 켜고 글을 쓰면 글이 잘 써질 것만 같은 기분. 그렇게 향을 맡으며, 커피를 마시며 잠시 마음의 안정을 취한다.
맥북을 연다. 어떤 글을 쓸까 하다가, 느닷없이 바탕화면을 정리했다. 사진 폴더를 열어 연도별로 분류해볼까 하다가 추억의 박물관 속으로 빠져든다. 뜨거운 여름, 그때의 웃음이 기억난다. 지금보다 조금 더 살이 빠져있고 생기 있는 나를 본다.
아. 디자인하는 걸 깜빡했다. 디자인할 줄 안다고 떠들었다가는 이렇게 고생한다는 걸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걸. 아무튼 의뢰받은 현수막 디자인을 마무리했다. 마이너 한 나의 감성을 빼고, 대중적인 디자인으로다가.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 두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이제 진짜 글을 쓴다. 커피가 차가워졌고, 약간 지쳤다. 시간도 많이 지났다. 난 왜 글쓰기 전에 이렇게 긴 예열이 필요할까. ‘진짜 글쟁이’들은 아침에 눈떠서 자리에 앉자마자 좋은 글들이 나오는 건 아닐까. 자신감이 없어진다. 내가 진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일까? 맥북을 닫는다. 감성을 불러내는 성스러운 의식은 오늘도 실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