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종로 3가 1번 출구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 핸드폰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지하철을 타려고 하시더라. 출구에는 계단 두 개가 있었어.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거기를 못 올라가시는 거야. 몇 번이나 시도하는데 잘 안돼. 근데 난 누굴 도와주는 것에 있어서 약간 주저함이 있거든. 내가 동정하는 걸까 봐. 근데, 할아버지한테는 뭔가 용기가 났어. 결정적으로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되게 조심스럽게 가서
“할아버지, 도와드릴까요?”
하고 말했어.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고마워요. 내가 힘이 없어요.”
라고 했어. 난 할아버지의 왼쪽 팔을 잡아서 부축해드렸어. 근데 내가 너무 놀란 건 뭐냐면, 할아버지 팔에 정말 힘이 하나도 없는 거야. 너무 가벼웠어. 그리고, 너무 쉽게, 너무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할아버지가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줬단 거야. 할아버지는 계단 두 개를 금방 오르셨어. 그러고는 이제 괜찮다고 하면서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셨거든.
할아버지가 내려가면서 내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그 잔상이 사라지지를 않아. 팔의 무게도. 말하는 지금도 생생하다. 얼마나 가벼운지. 그러면서 내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우린 계단 올라가는 거, 솔직히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숨 쉬듯이 당연하게 할 수 있잖아. 근데 나이를 점점 먹어서 노인이 되면 당연하게 살던 일상이 당연해지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구나.
내가 좋아하는 작품 ‘은교’에서 시인 이적요는 보들레르의 이런 시를 인용해.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c.p. 보들레르(baudelaire), ‘노파의 절망’에서-
은교는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알 수 없어. 왜냐면 젊음에 갇혀있기 때문에. 은교의 엄마도, 작가 서지우도 그 아름다움을 몰라. 근데 이적요는 젊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야. 지혜의 눈을 가리운 젊음이 걷히면 새로운 관점의 세상을 보겠지. 대신에 그때엔 새로운 것에 대한 경이로움도, 꺄르르 웃어대는 순진함이 없어질지도 몰라.
난 내가 지금 돈과 시간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가고, 가끔 찾아오는 좌절이 내 삶을 제한적으로 만드는 상황만 한탄했지, 계단 두 개를 오르지 못하는 날이 내 인생에서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해봤어. 그러니까 저절로 겸손해지더라. 내가 마음껏 걸을 수 있는 무릎이 있는 게, 딱딱한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는 건강함이 누군가에겐 상실일 수도 있는 거잖아.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만, 젊음이 영원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그게 청춘의 미련함이지만, 그리고 청춘의 때에 미련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찬란한 이 시기를 미련하고 오만하게 쓰지 말아야겠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가 절대 당연하지 않은 거.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렇게 알려줬어.
- 글의 제목은 소설 '은교'에서 인용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문학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