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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가는 KTX

13호차에 탄 남자

by 윤지영



훌쩍 떠나고 싶었다. 홀로 부산으로 가는 KTX를 탔다. 13호차 칸에 나 혼자다. 오늘은 아무도 부산에 내려가지 않나 보다. 노트에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한 남자가 앉았다. 통화를 한다. 좌석이 텅텅 비어서 남자의 목소리는 확성기처럼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통화 내용에 집중된다.



“… 멀미해서 토했다 아이가. 절에 가서 기도도 했는데, 오른 다리가 고장이 나가… 몸을 못 풀었다. 진짜 춥고, 비 왔거든. 진짜 디지고 싶다. 우리한테는 인생이 걸린 문젠데, 진짜 피도 눈물도 없데이.”



남자는 부산 사람인데 잠깐 서울에 올라와서 무언갈 했나 보다. 그런데 그게 잘 안 풀렸던 거 같고.



“아니 그래, 아무한테도 원망 안 하는데 그냥 내한테 원망하는 거지. 안다. 다 끝난 건 아니지만, 다음 스테이지까지 넘어갔지만, 너무 못해가. 내가 뭐 때문에 한 달 동안 그 고생했는지. 대충 계산했을 땐 또이또이 된 거 같은데, 면접에서 갈리겠지.”



테스트를 봤나 보다. 혹은 오디션?



“걱정보다도 더 큰 감정은 뭐냐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까 봐. 그런 생각 안 들겠나. 니 같아도 착잡하지? 내가 못돼서 그런 거 아이지? 아니 이거 선택했기 때문에 올인한 거 아이가.”



전화 너머 누군가의 공감을 원하고 있다. 근데 상대방은 쉽게 공감해주지 않는 스타일 같다.



“하. 후. 그래 네 말대로 오늘 이렇게 개더러운 운이었으니 기분이 이럴 수밖에 없는 거지. 나도 성격 좋은 사람처럼 다음에 잘하면 되지 하고 싶다.”



엿듣는 거 들킬까 봐 저 사람 얼굴도 못 쳐다보겠는데, 저 말은 조금 마음이 아프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통화내용을 받아 적으며, 귀를 기울이며, 그러고 있다.



“결과 발표 날 때까지 난 긴장할 거야. 니 내 성격 알잖아. 최선을 다했단 말은 못 하겠고… 아 어. 절뚝거리면서. 먹은 것도 다 토했어. 나도 기분 좋게 대충 평타 쳤다 하고 싶은데, 아 평타 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잘해보려고 온 건데… 아 잘 안되네. 부산도 비오나.”



저 말을 하는 남자의 표정은 어떨지 궁금하다. 어떤 표정으로 저런 암담한 말을 하고 있을까.



“그래. 니 붙잡고 있어봤자 헛소리만 할 거 같고. 가는 동안 잠은 못 자겠고, 멍이나 때려야지. 붙으면 사흘 있다 적성검사하러 다시 올라오라 하대. 그래. 알았다.”



묵직한 ‘알았다’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났다. 그와 동시에 열차가 출발했다. 패스트푸드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KTX, 창문을 때리는 비, 그리고 남자가 가져온 무거운 기운. 덕분에 부산으로 떠나는 설렘도 잠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남자는 어떤 심정으로 부산으로 내려갈까. 내가 통화내용 엿들은 걸 알까. 뭐 자기가 크게 얘기한 거니까 내가 엿들은 건 정당방위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가 듣던 말던, 그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위로가 필요해서 전화를 걸었던 것일 텐데, 위로가 안된 거 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내 동정을 원하지도 않을 거 같고. 그러니까, 몰래 엿들은 책임으로 작은 기도를 해야겠다.


통화 내용 엿들은 건 죄송해요. 그리고 제가 노트에 뭘 쓰다가 들은 거라서 노트에 그대로 옮겨 적은 것도 죄송해요. 이 글 브런치에 올린 것도 죄송해요. 어떤 테스트를 보신 건지 몰라도 붙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남자분을 포함한 이 땅의 많은 준비생들, 화이팅입니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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