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방송작가로 일하다보면 수시로 현타라는 녀석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만, 정말 가끔은, 오함마로 뚝배기를 깨먹힌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강력한 현타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말 그대로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진정한 현인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강력한 현타가 오는 순간은, 피디가 너무 무식할 때도 아니고 출연자가 또, 진상을 부릴 때도 아닙니다. 그 순간은 바로, 방송국엔 코빼기도 안 비추는 메인 작가가 얼마를 버는지 알게 됐을 때 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메인 작가라고 하면, 이 바닥에서 최소 20년을 버틴 덕에 그 방송국의 장승배기 급 대우를 받는 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나이를 드셔도 결코 일거리를 잃지 않으며, 일을 하면 할 수록 업무량은 주는 반면 급여는 중간급 작가의 서너배로 퀀텀 점프를 합니다. 어디나 그렇겠습니다만, 방송작가들의 업무량 대비 급여 역전 현상은 거의 저세상 수준입니다. 때문에 연차가 적은 작가일 수록 메인 작가의 연봉을 모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제가 일하는 분야도 광고를 수십억 단위로 벌어들이는 드라마나 예능이 아닌데도 winner takes it all 현상만큼은 다른 곳 못지않게 심각합니다.
하루는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선배 작가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선배가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방송국에 출근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선배는 거의 방송국 원년 멤버로서 다른 작가들은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20년의 세월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 우리 방송국 고인물계의 최종보스가 됐습니다. 그런 연차의 위클리 교양 작가는 프로그램 당 최소 월 오륙백 이상의 고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을 보통 두 개씩은 돌립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 1. '적당히 두 탕 뛰기'를 황금율처럼 지켜온 것인데, 그럴만도 한 것이, 업무의 대부분을 밑의 작가들이 도맡아하는 덕에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근까지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한다고? 제 반응에, 눈치가 구단인 선배는 코로나때문에 주로 재택근무를 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선배도 알고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이 연차의 작가들은 코로나가 있기 전에도 몇 시간을 일하는지 시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업무량이 현저히 적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막내작가, 서브작가가 방송국에서 며칠밤을 세우고 얼굴이 시커매져 있을 때쯤 짜잔하고 나타나 귀한 얼굴 보여주신 후 홀연히 사라지시는 분들이 바로 이 연차의 메인작가들입니다. 그러나 급여는 서브와 막내의 고료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액수를 받습니다. 섭외도, 코너 자막도 전부 밑의 작가들이 하지만 일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그래도 전에 같이 일했을 때는 일주일에 이틀은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달에 하루만 나오면서 그 고료를 받아간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화가 나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프로의 자세가 아닙니다. 진정한 프로라면 이럴 때일수록 이 꽉 깨물고 버텨서 20년 후에는 나도 한달에 한 번씩 출근하면서도 돈은 쭉쭉 빨아들이는, 다이슨급 진공청소기가 될 거라고 가열차게 희망회로를 돌려야합니다.
물론 그때가 오기까지 참다 참다 참깨가 될 수도 있고 가만 가만 있다가 가마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오분에 한 번씩 참을인 자를 새기며 버틴다고 해도 피디 운이 나쁘면 개편 때 끈떨어진 뒤웅박이 되기 십상이고, 어떻게든 가늘게 버티며 살다가 마흔 중반 즈음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가족을 꾸릴 시기는 놓쳤고, 그렇다고 집 한 채 사 놓을만큼 벌어 놓은 것도 아니고, 그저 미간에 주름만 잔뜩 잡혀서 날품팔이 원고 노예가 되어 있던 차에 세대 교체된 젊은 피디들은 함께 일하기엔 너무 늙었다며 나를 내동댕이치는 겁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이 모든 불운과 억울함을 이겨낸 최후의 1퍼센트로 살아남은 선배가 그만한 보상을 누리는 것이 또 합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프로페셔널 작가인 여러분들은 현타가 올 때마다 희망회로를 좋은나 돌려서 모든 역경을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방송작가 생존전략 No. 13
현타가 오면
가열차게 희망회로를 돌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