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개x과 부처님

by N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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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오늘은 영화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날입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외출을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걸어서 4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도, 오늘은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영화모임을 진행하는 감독에게 추파를 던지다 까였는데도, 요만큼도 불편한 마음이 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즐겁습니다.


1. 2기 영화모임과 깨방정

이번 2기 영화 모임에는 전직 크레인 기사였다는 걸걸한 50대 언니와 공공기관 그만 둔 것을 가지고 자꾸 공무원직을 그만뒀다고 말하는 40대 허세 언니, 그리고 웬만한 어머니들보다 다정한 50대 후반의 아버님이 참여합니다.


이 아버님이 얼마나 다정하시냐면, 지난 번에는 시골에서 배를 수확했다며 깎은 배를 일회용 포크와 함께 락엔락에 담아오셨고 그 전엔 집에서 구운 향기로운 올리브 빵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아내가 디저트 공방을 열었다며 이런 놀라운 선물을 가져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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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귀한 디저트 선물은 받아본 적이 없는 촌사람인 저는, 받자마자 '아이고 깨가 비싼데..'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그런 반응은 처음이라며, 깨가 진짜 비싼데 어떻게 알았냐고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원래 깨와 잣과 김치는 비쌉니다. 받는 즉시 갖은 미사여구를 붙여 마음을 표해야 합니다.


2. 자영업과 죄와 벌

그렇게 아저씨의 사모님이 오픈한 디저트 공방과 자영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도 12월부터 살짝 자영업에 발을 담그게 됐다며 자연스럽게 글쓰기 수업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수업이냐고 묻길래 '<죄와 벌>강독과 글쓰기' 수업이라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허세 언니가 "죄와 벌? 쫌 아닌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례함에는 송곳처럼 화가 치밀어오르는 법이지만, 귀한 깨강정을 잘 얻어먹고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설명해줬습니다. 한 번쯤은 읽어야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제목만 아는 작품이니 제대로 완독해보고 싶은 사람이 분명 있을 거다. 그리고 포인트는 '죄와 벌'이 아니라 '글쓰기'다. 등등.


그런데 저의 이 구구절절한 설명에도 허세 언니는 좀처럼 무례함을 버리려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래도 죄와벌은 쫌 아닌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엔 지금 누구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나.. 이거 아주 개년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깨강정의 효과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제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싹 가셨고 저는 눈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제 눈길을 피했고 눈치빠른 감독은 어서 영화를 보자며 플레이 버튼을 눌렀습니다.


3. 개x과 부처님

영화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개복치만큼이나 단순한 저는 아까의 분노는 그새 잊어버리고 신이 나서 아버님과도, 허세 언니와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던 영화에 대한 모든 상념을 모두 쏟아내버린 저는 기분좋은 빈 쭉정이가 되어 다시 집을 향해 길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걷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처럼 폐쇄적이고 게으른 인간이 40분이나 걸어야 하는데도 꼬박꼬박 이 영화모임에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재밌기 때문이다. 왜 재밌나? 쉽기 때문이다. 왜 쉽나? 아무런 사전 준비도, 숙제도 없이, 가서 틀어주는 거 보다가 실컷 입만 털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마다 교회 가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으로 꼬박꼬박 이곳에 오는 것이다.'


그러자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죄와 벌>은 어렵다. 매주 150페이지씩 읽어야 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토론도 재미없고 그걸로 글을 쓰는 것은 재미가 없다. 이게 무슨 대학교 전공 수업인가? 과연! <죄와 벌>은 쫌 아니구나!'


그래서 좀 더 쉬운 텍스트로, 덜 부담스럽고 더 재밌는 커리큘럼을 짜기 위해 아예 클래스 오픈 날짜를 미루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자 갑자기 허세 언니가 실은 개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부처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을 벌이려는 사람에겐 이런 솔직한 의견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섣불리 솔직한 의견을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괜히 욕이나 먹기 좋기 때문이빈다. 오직 무례한 개x만이.. 아무튼 언니를 향해 감사의 백팔배를 드려야겠습니다.


사실 11월은 신춘문예도 준비해야해서 이래저래 바쁜 일이 많은데 잘 되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던져주는 일거리나 얌전히 받아먹으면서 내 글쓰기부터 마무리해야겠습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25

기분 나쁜 의견은 부처님 말씀처럼 들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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