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잡이 제비꽃, 모라넨시스 키우는 법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한 달쯤 전에 화훼단지에서 식충식물을 샀습니다. 연두색 이파리로 수줍게 벌레를 녹여먹는 벌레잡이제비꽃, 모라넨시스입니다.
집에 와서 화분에 옮겨 심으려고 보니 적당한 화분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벌레잡이 제비꽃은 흙도 아닌 이상한 것에 심겨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수태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화분도 없는데 그런 게 집에 있을리가 없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벌레잡이제비꽃은 습지에서 자생한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상토에 심어 습하게 키우면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대충 채반에 상토를 채워 옮겨 심은 다음 그늘에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불쌍한 녀석이 하루가 다르게 병들어 갔습니다.
강한 녀석인 줄 알고 이름도 예까쩨리나로 지어줬는데, 우리 집에 온 순간부터 벌레도 안 먹고 통통하던 이파리는 누렇게 뜨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마른 버짐같은 게 이파리 한 가운데 떡하니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봐, 우리 집엔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이 꼴이 된 후에야 안 되겠다 싶어서 긴급 소생술을 펴기로 했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프린세스로 바꿨습니다. 너는 예까쩨리나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어.
소생술이라봤자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다이소에 가서 하이드로볼과 적당한 화분을 하나 사와서 옮겨담은 것 뿐입니다. 찾아보니 벌레잡이 제비꽃은 '수태'에서 잘 자란다고 합니다. 수태는 물이끼나 산이끼 등을 건조시킨 것을 말합니다. 다이소에 팔지 않으니 건너뜁니다. 대신 배수와 통기, 그리고 보습이 잘 되도록 상토 아래 하이드로볼을 깔아줬습니다. 유튜브 보니 남들은 항아리 뚜껑 같은 곳에 수태를 넉넉하게 깔아서 고급지게 키우고 있었지만 남들 하는 거 다 따라하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입니다.
자, 프린세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턴 알아서 생존하도록. 그래도 빌빌거린다면 너를 잘게 조각내서 고추 화분에 거름으로 쓰겠다.
제 마음을 읽은 것인지 프린세스는 화분을 옮겨 심은 후로 악착같이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인가에는 이파리에 벌레도 한 마리 붙어 있었습니다. 프린세스가 다시 추파춥스처럼 벌레를 찹찹 녹여먹기 시작한 겁니다. 참으로 기특한 일입니다.
그 즈음 화분에는 자연스럽게 이끼도 끼기 시작했습니다. 벌레잡이꽃은 굳이 수태를 살 필요없이 상토를 촉촉하게만 해주면 잘 자랍니다. 괜히 이것저것 다 해주면 버릇만 나빠질 뿐입니다.
프린세스를 다시 정성들여 키우다보니 이 녀석이 왜 처음에 우리집을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벌레잡이제비꽃은 해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해가 쨍하고 비치는 곳에 걸어두면 솜털이 반짝반짝한 이파리마다 벌레들을 한 마리씩 잡아 녹여먹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음습한 구석에만 두었으니, 프린세스가 그렇게 온 몸으로 싫어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뿌리도 약한 주제에 성격이 얼마나 괄괄한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아침에는 프린세스의 중심에서 무언가 동그란 것이 하나 나와 있었습니다. 이것은 설마..!
이 동그란 것은 점점 색깔이 짙어지더니,
오늘 아침에는 급기야 고개를 번쩍 쳐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네가 벌레잡이 '제비꽃'이구나!
꽃이 만개하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알을 깨고 꽃을 피워냈으니, 녀석의 이름을 다시 지어줘야겠습니다. 새 이름은 아브락사스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데미안>
저도 제 알을 깨고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가야겠습니다.
참고로 우리집 고추 화분은 실제로 모든 풀들의 무덤입니다. 조금 시들거나 떨어진 잎들은 죄다 고추 화분 속으로 들어갑니다.
고추 나무는 그렇게 동지들의 피와 살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11월 중순인데도 꽃을 피우고 고추 열매도 벌써 다섯 개나 맺었습니다.
고추나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노래가 플레이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