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가을을 마무리하는 비가 내리는데, 고즈넉한 밤 보내고 계신지요?
1. 방송국 감사실의 민원 처리
저는 며칠 전에 방송국 감사실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감사실 직원은 제가 지난 8월에 우리 부서 김과장에 대해 제기한 민원을 종결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고, 이쯤하면 김과장도 많이 심란했겠다 싶어 그럽시다, 하려고 했습니다. 그 전에 우선 감사실에서 민원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감사실 남자는 아직 처리된 게 없다고 했습니다. 민원을 넣은지 4개월에 접어드는데 아직 김과장을 부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할머니 랩하듯이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민원을 신청한지가 4개월이 다 되가는데 사람을 부른 적도 없다는 게 말이 되냐, 당신도 방송국 정직원이라 결국 느그 직원 편 들겠지만서도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무슨 검찰 조사를 요청했냐, 무슨 감사실에서 조사하는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냐, 나도 매일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이걸 붙잡고 있으라는 거냐 등등. 말하면서도 아직 40도 안 됐는데 이렇게 넋두리하듯 말하는 버릇이 생겨서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음 계약에 영향을 미칠까봐 그저 예예하고 넘어가던 제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요? 그것은 전부 고구마 때문입니다.
2. 고구마 심기
얼마 전에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마침 집에 스티로폼 박스도 있어서 주문한 고구마들 중에서 잘 생긴 녀석 3개를 픽해서 상토에 심었습니다. 스티로폼 박스를 사용할 땐 박스를 그냥 사용하면 안 되고 바닥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양파담는 망사 주머니같은 것을 깔아 배수가 잘 되게 해줘야 합니다. 그런 후에 상자 밑에 스티로폼 박스 뚜껑을 뒤집어 놓으면 화분받침까지 있는 간이 화분이 완성됩니다.
사실 이 화분은 깊이가 얕아 고구마를 키우는 용도는 아니고 싹을 틔우는 용도입니다. 고구마를 키우려면 최소30~40cm 깊이의 화분이 필요합니다. 그런 화분은 비쌉니다. 그런데 유튜브에서 그냥 커다란 비닐 봉지에 대충 상토 넣고 고구마를 심어서 나중에 봉지를 쭉쭉 찢어 고구마를 수확하시는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힙해 보여 저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고구마를 심고 나니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든든해졌습니다. 쿠팡 일용직을 뚫은 데 이어 구황작물 키우는 법까지 터득했더니 어쩐지 먹고 살기 챌린지, 레벨 1 정도를 깬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원고를 언제 받을 수 있냐고 묻는 조연출에게 기다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방송국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요청하지 않아도 언제나 가장 빨리 원고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료만 전달 받으면 주말이든, 연휴든 상관없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자료를 전달해주는 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늘 대기 상태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저는 토요일은 커녕 일요일 조차 온전히 하루를 쉬지 못한 채 늘 대기상태에 있거나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6개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당하는 방송작가의 일상입니다.
그런데 몇 달 후면 고구마가 주렁주렁 열린다고 생각하니 이런 아등바등한 삶을 청산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방송국놈들에게 기다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지난 8월 김과장을 감사실에 찌른 순간 이 방송국과는 틀어져버린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노예 생활의 근성이 관성처럼 남아 저는 지금까지도 제 빨간날을 반납해가며 빠르고 확실하게 원고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연출에게 기다리라고 하면서 '다른 일'과 일정이 겹치기 때문에 너네 일은 다음주에나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른 일'이라는 것은 바로 고구마 심기입니다.
3. 글쓰기 강의
그렇게 쿠팡과 고구마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을 느끼던 중에 동네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를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말이 학원이지, 친구의 학원은 가서 보니 6인용 테이블 하나에 공간이 꽉 차는 작은 공방같은 곳이었습니다. 친구는 원래 동생과 함께 성인을 대상으로 회화나 공예 수업을 하려고 학원을 차린 건데, 학원이 너무 안 되서 월세도 못 버는 실정이라 접을까 생각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 주둥이가 갑자기, 두 달 만에 접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나한테 오전 시간 동안 학원을 빌려주면 대여료로 20만원 정도 내고 여기서 수업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월 20만원도 겨우 버는 목이 안 좋은 학원인데,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얼굴은 이미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고, 저의 제안은 바로 그녀의 동생에게도 전달됐기 때문에 저는 두 사람의 기쁨을 차마 줬다빼앗을 수 없어 당장 다음 달부터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곰곰이 짱구를 굴린 끝에 '<죄와 벌> 강독과 글쓰기 수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죄와 벌>은 왜 들어갔냐면,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좋은 소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벌>은 제가 7년 동안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면서 읽은 작품 중 인간에 대해 쓴 가장 거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목이 간지난다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 가르치는 측면에서도, 러시아문학으로 석사까지 했으니 이 동네에서 <죄와 벌>은 제가 제일 잘 가르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7년 째 방송작가로 먹고 살고 있으니 글쓰기도 제일은 아니어도 아마 서너번째로는 잘 가르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양질의 텍스트를 읽히고 이를 소재로 인간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후 자신이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이 수업의 목표입니다. 사실 요즘은 영화 한편을 보고 나서도 단순히 좋다, 싫다를 넘어서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거 좋아, 혹은 그거 별로야로 끝내버리는 납작하고 빈약한 표현력 상실의 시대에 나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수업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이 검소하고 소박한 동네에서 과연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이런 수업을 들을까? 하는 것입니다. 책도 새로 사고 강의 홍보물도 열심히 만들었는데, 갑자기 성적표 받는 날을 앞둔 학생처럼 긴장됩니다. 그럴 땐 베란다로 나가 고구마 화분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고구마야, 니가 있으니 아무래도 괜찮아.
4. 저는 이제 방송국의 갑질을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쿠팡과 고구마와 글쓰기 강의까지 생긴(아닐 수도 있지만) 저는 갑자기 뒷배가 든든해져 방송국 감사실에서 보낸 질의서를 다시 정성스럽게 작성했습니다. 김과장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겠냐는 질문에는 경쾌하게 '네'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감사실 호출을 받는 김과장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지은 악업의 과보는 깊은 산, 깊은 바다에 숨어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정리하면,
팡과 고구마와 강의가 있으면 방송작가는 방송국의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한테 족같이 굴지 마세요, 방송국 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