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친구가 불행을 대하는 태도

[일상쓰기] 그 불행,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by NOPA

잘 나가는 친구가 불행잘 나가는 친구가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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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잘 나가는 친구가 있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고, 전문직종에 일하고, 서른이 갓 지나서부터 이미 월천대사가 된, 옅은 머리숱 외에는 아쉬울 것이 없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자신의 집안 이야기기를 할 때면 세상 불행한 사람의 얼굴을 하곤 합니다.


우리 친가 친적들이
얼마나 우리 할머니를 괄시를 했는지 알아?
우리집 얘기 들으면 아마 깜짝 놀랄걸?


틀렸습니다. 저는 웬만한 집안의 불행한 역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면 보통 상대방은 자신의 불행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말을 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번에도 또, 세상 제일 불행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육이오 때 돌아가셨어..
진짜 우리 집에 불행한 역사가 많다.

아마 머리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너희 할아버지는 머리숱이 많냐고 물어서 나온 얘기였을 겁니다. 대머리는 격세유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불행해지니.. 저는 이번에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이참에 자신의 집안에 얼마나 큰 불행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태세였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내 앞에서 집안의 불행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 할머니는 눈이 하나밖에 없었으니깐.

왜?

육이오 때 총을 맞으셨기 때문이지.

아...

근데 그 총 쏜 사람이 시가 작은 집 아들이지.

아...

근데 그 사람이 할머니만 쏜 게 아니라 할머니 애들도 두 명이나 쐈지. 그러니깐 나한테는 큰아버지와 고모가 되는 분들이지. 그때 애들은 죽고 할머니만 살아남으셨지.

아...


너, 사람 눈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
성인남자 주먹만 해. 완전 심연이야.
그렇게 큰 심연이 얼굴 한 가운데 뚫린 거본 적 있어?
난 할머니랑 같이 살아서 어렸을 때 내내 봤지.
왜, 니체가, 심연을 자꾸 들여다보면
심연도 너를 들여다본다고 했잖아,
난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니깐.



이쯤 되면 대화는 끊기고 맙니다.

6.25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슬픈 일이지만, 그걸 아버지도 아니고 손자가, 마치 자신이 그 불행을 겪은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도 인생에 불행이 없는 나머지, 아버지의 아버지 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겨우 한 가지 불행을 건질 수 있을 만큼 친구의 삶이 평온하고 순탄했다는 것을 반증할 뿐입니다. 친구는 그런 불한 환경을 극복하고 빛나는 오늘을 이룬 자신의 노력을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나 아쉽게도 그것은 친구의 불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불행이 아닙니다


저희 할머니도 시집와서 작은 집 총각이 쏜 총에 두 아이를 잃고 한쪽 눈까지 잃었지만, 그것은 제 불행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안대를 벗고 소독하는 모습, 술을 들이키는 모습, 한을 못 이겨 악을 쓰는 모습, 그리고 간간이 제게 웃어주시는 모습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걸 마치 제 불행인 양 술을 마시고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할머니의 불행까지 훔치려는 고약한 심보입니다.


그런데 몇 년 살다보니 유독 좋은 학교 출신의, 중산층 환경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그런 ‘불행 훔치기’를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도 힘들게 공부하고 힘들게 노력해서 좋은 학교, 좋은 회사에 갔는데, 사람들이 노력을 알아주지 않으니 약이 오르는 것입니다. 운 좋게 좋은 집에서 태어나 편하게 인생의 기반을 닦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심통이 나는 것입니다.


골이 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여러분은 운 좋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편하게 인생의 기반을 닦은 것이 맞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난 사람들은 여러분이 들인 노력에 더해 돈과 생계와 가족들과의 불화까지 극복해야 겨우, 그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없는 불행도 만드는 사람들

그 친구 말고도, 제 주변에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그 덕을 실컷 누리면서도 습관처럼 불행을 입에 올리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정치인 욕, 연예인 욕, 잘 사람 사는 욕, 가난한 사람 욕 등 온갖 욕으로 시작해 언제나 그들로 인해 자신이 겪게 되는 숱한 불행들로 끝이 납니다. 자신의 불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까지 끌어다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앞의 친구가 자신이 이룬 것을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불행을 훔쳤다면, 이 친구는 부유한 환경 속에서도 반듯하게 살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없는 불행을 훔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젠 도둑맞은 가난이 아니라 도둑맞은 불행입니다. 이렇게 계속 남의 불행을 훔치면, 있는 행복도 달아나버릴 것 같습니다.


저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나간 불행은 불행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가난은 오히려 행운인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사랑을 받았다면, 빈곤하든, 분란이 끊이지 않았든,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도 겪을 만큼 겪었고, 저희집은 어디다 내놔도 뒤지지 않을만큼 거대한 분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오죽하면 가족끼리 총질을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저는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내가 얼마나 큰 불행을 겪었는줄 알아? 하며 불행을 전시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냥 그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다 흘러갔을 뿐입니다. 아, 딱 한 번, 좋아하는 남자를 꼬시기 위해, 사람 눈이 얼마나 큰 줄 알아? 하면서 할머니 얘기를 했던 적은 있습니다. 인체의 신비의 관점에서.. 대체 저는 유혹을 왜 이런 식으로..


그 불행,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나간 일을, 가족의 일을 내 불행처럼 끌어안고 계시다면 지금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 불행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남의 이야기까지 전부 내 불행으로 끌어안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볕이 이렇게 잘 드는 데, 대파와 고추가 이렇게 새파랗게 자라는데, 대체 왜 할아버지 불행까지 끌어안고 불행을 사고 있단 말입니까? 그 불행, 당신 것이 아니니 얼른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운 좋게 번듯하고 넉넉한 집에서 사시는 분이라면, 나의 행운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나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의 불행까지 훔쳐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그래도 서러운 사람들한테서 가난도 훔쳐가고 불행도 훔쳐가니, 아주 얄밉단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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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2978050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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