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쓰기] 영화 마더 후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최근 김혜자 배우가 책을 낸 이후,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인생을 산 배우의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귀동냥해 들어오던 터라 그녀의 연기 인생 정점의 작품이라는 <마더>를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벌써 14년 전에 개봉된 영화입니다. 언제 봤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제가 본지도 10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볼 당시의 저는, 인생이 저를 위해 많은 기쁨을 꽃잎처럼 깔아놓은 시기를 지나고 있던 탓에 당최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김혜자 배우의 주름 가득한 얼굴은 별로 아름답지 않았고 원빈마저도 못생겨 보였고 등장하는 인물마다 불행과 가난의 흔적을 숨기지 못하여 영화 전체에서 꼬질꼬질한 냄새가 나는 듯 했습니다. 그 황홀하다는 엔딩과 오프닝의 춤 장면도 이해될 리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역시, 북어는 두들겨 맞은 후에 맛이 더 깊어지듯, 사람은 인생에 쳐 맞아봐야 희로애락을 제대로 알게 되는 듯 합니다. 저는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김혜자가 저토록 깊은 우울을 가진 배우라는 사실을, 봉준호는 역시 천재라는 사실을, 불쌍하고 징그럽고 무서운 마더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감독만이 배우의 인생 연기를 이끌어낼 수 있지.
얼마 전에 유튜브에 돌아다니던 김혜자님의 유퀴즈 출연 영상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거기서 김혜자 배우는 <우리들의 블루스> 리딩 당시 자신의 연기를 탐탁지 않아하는 노희경 작가에게서 욕을 먹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기구한 사연을 가진 여자를 귀엽게 연기하면 어떡하냐, 그런 식으로 연기하시면 앞으로 누가 캐스팅을 하겠냐.. 등등의 이야기를 노희경 작가로부터 듣고, 처음에는 이게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고 인물에 좀 더 몰입해 연기를 했다는 김혜자님의 훈훈한 결말과 달리 저는 지금도 노희경 작가의 그 전화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TV 드라마가 아무리 작가가 휘어잡는 판이라고 해도 연기는 연출의 영역입니다. 노희경 작가는 그런 기구한 역할을 김혜자 배우에게 맡기면서 아마 <마더>에서의 엄마 연기를 원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유능하고 노련한 연출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야기의 톤과 의도를 충분히 체화한 연출들만이 열 번, 스무 번씩 재 촬영을 해가며 배우로부터 그런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마더>에서 엄마의 광기가 극한으로 발휘되는 고물상 씬은 무려 서른 번을 반복해서 찍은 끝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 연기를, 고작 전화 한 통화로, 배우의 자존심을 긁어가며, 싫은 소리 몇 마디 던져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입니다. 만일 배우가 연기하는 톤이 작가의 의도와 다르다면, 그것은 대본을 잘못 이해한 연출의 탓이고, 연출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작가의 탓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톤과 의도를 오롯이 자신이 쓴 대로만 전달하고 싶다면 드라마가 아니라 소설을 써야 합니다.
<마더>의 엄마 연기는 오직 영화에서만, 오직 봉준호가 감독일 때만 가능합니다
태생적으로 TV드라마에서는 <마더>의 엄마 같은 연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회에서 시청자들의 눈물 콧물 쪽쪽 빼는 감정의 격변, 비통함의 배설, 이 정도가 TV 연출이 배우들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그 정도의 슬픔과 그 정도의 따뜻함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신파 씬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갈등 봉합 장면이 이어집니다. 단합 운동회 같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깊은 우울, 웃고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배어나오는 서늘한 슬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얼굴, 이런 것들은 한 회 한 회 찍어내기에도 정신이 없는 드라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연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드라마 연출은 남이 쓴 글로 영상을 찍는 사람입니다. 대본의 모든 톤과 의도를 제것처럼 체화하지 못한 연출이, 배우로부터 그런 류의 연기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오직 자신의 머리로 대본을 쓴 연출만이, 혹은 작가와 한 머리처럼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눈 연출만이, 배우에게서 그런 연기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더>를 보면서 이것은 김혜자라는 배우가 봉준호라는 감독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더>의 미친 모성은 어떻게 탄생했나?
김혜자에게는 <마더>의 엄마가 가진 우울, 광기, 슬픔을 끌어낼 수 있는 극적인 개인사가 있습니다. 그 사정을 알았든 몰랐든, 봉준호는 기존의 국민 엄마 김혜자에게서 그런 감정의 가능성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김혜자만을 생각하며 <마더>의 시나리오를 썼고, 촬영하기 5년 전부터 김혜자에게 계속 전화를 해서 그 여자, 도준이 엄마의 기구한 사정을 들려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감독과 배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마더>의 엄마 이야기에 물들어가고 몰두한 끝에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본 적 없는 이런 광기의 모성 연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는 원고를 털어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 드라마 작가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남이 쓴 이야기로 영상을 찍는 TV 연출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자극적인 소재로 상업적 성공만을 바라는 평범한 감독들 또한 닿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좋은 감독이 계속 나와야 하고 좋은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영화를 통해 모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화석 같은 신화의 이면을, 엄마의 욕망과 슬픔과 우울의 근원을, 그저 보고 듣고 느끼면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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