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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Feb 26. 2023

최은영 <밝은 밤>과 소설의 효용

왜 소설은 쓸모가 없는가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주말 내내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었습니다.



영화는 세 시간도 길다고, 결심을 해가며 보면서도 이틀은 우습게 내줘야 하는 책은 아무렇지도 않게 첫 페이지를 넘깁니다. 물론 한 번에 다 읽는 책은 별로 없습니다. 중간에 덮는 것이 어렵지 않으니 펼치는 것도 쉬운가 봅니다.


사실 소설은 정말 쓸모가 없습니다.

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오를만한 부동산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대박 주식 종목도 얘기해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실제로 일어난 일들도 아닙니다. 작가가 그럴듯하게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자본주의 논리로 보면 정말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설에는 그런 단순한 자본주의 논리로는 측정할 수 없는 효용이 있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읽기를 멈추면서 이 구절이 내 마음을 잡고 흔드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럼 언젠가 저도 이런 생각을 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을 겪었던 날도 떠오릅니다. 그러면 그때 묻어두고 지나갔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그때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일순 깨닫게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 그렇습니다.



#1. <밝은 밤> p. 95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정말이지 부모에게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 역할을 너무도 충실히 해주는 언니에게 치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한 번씩 힘들다고 할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이, 참아라, 였기 때문입니다. 돌아올 대답이 정해져 있으면 굳이 말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결혼 생활이 힘들다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돌아온 대답은 "그래도 어쩌겠냐, 참아라" 였습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엄마도 달리 해줄 말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조용히 수속을 밟았고, 이혼했고, 결과를 말씀드렸습니다.


제 이혼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시는 어머니께 저는, 그래도 어쩌겠냐고, 참으시라고 했습니다. 저도 달리 해드릴 말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도 더는 내색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시절을 잘 참았습니다. 이제 엄마는 원하실 때 언제든 저희 집에 올 수 있습니다. 저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부모님께 해드리고 싶은 것을 해드립니다. 어떤 미련도, 어떤 아쉬움도 없이 저희는 이혼 후의 삶을 누리는 중입니다. 



#2. <밝은 밤> p.135

“넌 이보다 잘 살 수 있는 애였어. 똑똑하고 밝고, 너같은 애가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 그렇게 엄마 마음에 안 차?”
내가 울컥해서 말하자 엄마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엄만 네가 더 잘 살았으면 하는 거지.”
... 엄마는 일평생 내게 기대하고, 실망했다.

이 구절을 읽었을 땐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올 때마다 아버지는 "네가 기집애가 아니라 사내애였어야 했는데.." 하는 말을 되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원도 아버지 몰래 다녀야했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이 학원에 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없는 형편에 학원비는 꽤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되뇌이던 말을 생각하면, 제가 사내애였다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학원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학원비를 아까워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집안 형편을 모른척할 수 없는 착한 딸이었고, 결국 고등학교때부터는 학원 대신 도서관을 다니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제게 고시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제야 제가 기집애여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덕분에 집안 형편을 모른척하지 않는 착한 딸로 자란 관계로 아버지의 꿈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고시 학원비는 동네 학원 입시 종합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기집애, 기집애 하면서 자식을 어떤 중요한 부분이 결핍된 존재로 보는 아버지라면,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버지의 기대와 꿈에 아무런 부채감을 느끼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요즘 저희 아버지는 새로 일을 시작하셨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저를 볼 때마다 용돈을 주십니다. 주지 말래도 몰래 제 가방 안에 봉투를 넣어둡니다. 저는 그 돈을 볼 때면 꼭 고등학교때 아버지가 주지 않았던 학원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고보니 아버지는 이제 제게 무엇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내애가 아니라고 아쉬워하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우리가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합니다.



소설의 효용


이 모든 기억들은, 그리고 이 모든 마음들은, 전부 <밝은 밤>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들입니다.


그제야 서운하기만 하던 엄마의 마음이 6, 70년대를 보낸 여성이 가지게 되는 보통의 마음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아버지가 보여주는 마음이 그 시절에 대한 부채감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런 앎과 깨달음이 자본주의 논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바로 여기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설의 효용이 있습니다.



최은영의 <밝은 밤> 추천드립니다. 밝은 밤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모든 소설을 추천드립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02760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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