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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May 10. 2023

[노파의 글쓰기] 멍청해지는 시간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저희 집에는 TV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뭔가를 구독해서 보는 것도 아닙니다. TV도 안 보고, 넷플릭스도 안 보고, 티빙도 안 보고, 왓차고 뭐고 아무것도 안 봅니다. 그저 뉴스를 보고, 팟캐스트를 듣고, 트위터를 봅니다. 제가 생각해도 노잼이 육화한 인간 같습니다.


그래서 두 달에 한 번, 미용실에 가는 시간이 제게는 아주 소중합니다. 정확히는 염색방입니다. 오직 염색만 해주는 곳입니다. 심지어 머리도 셀프로 말려야 합니다. 그런데 뿌염 비용이 17,000원 밖에 안 합니다. 안 갈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염색을 하러 갈 때마다 천장에 매달린 작은 TV를 넋을 놓고 봅니다. 입을 헤 벌리고 봅니다. 두 달에 한 번, 이렇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있는 시간이 정말 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해방일지>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장님입니다. 사장님은 50대 여성분이신데, 그렇게 화가 많습니다. TV를 보는 내내 화를 냅니다. 아마 화를 내기 위해 TV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 사장님을 화나게 한 것은 <해방일지>의 구씨로 나온 손석구였습니다. '저이가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지 모르겠다, 매번 똑같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가 오늘 그녀가 화가 난 이유였습니다.


평소에는 드라마 이야기에 분을 삭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피해다니지만, 이곳은 염색방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다, 심지어 구씨는 알콜중독자가 아니냐. 허구헌날 산 보면서 술만 마시는 사람이 좋다고 다가와도 도망가야 할 판에, 말이 안 된다' 라며 진지하게 맞장구를 쳐줬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은, "맞어, 알콜 중독자면 잘 서지도 않을 거 아냐"라고 응수했습니다. 저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나눌만큼 막역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이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런 말도 능란하게 받아칠 수 있어야 하는 건가.. 이것이 진정한 언니들의 세계인 것인가.. 짧은 순간 이런 여러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저는 "그건 생각해보지 않아서.." 라고 대충 둘러댔습니다. 그래서 혼났습니다.


"그걸 왜 생각 안 해! 응? 짝짜꿍을 해야할 거 아냐!"

"아.. 짝짜꿍을 꼭 해야되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말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작가이지만, 염색방 사장님한테는 응수할 말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장님은 중요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저의 순진함을 한동안 나무랐습니다. 낼모레 마흔이고, 결혼생활도 9년이나 했고, 짝짜꿍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여한이 없는데, 다 부질없었습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판단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이번엔 제 얼굴에 있는 잡티가 문제였습니다. 사장님은, 이거 기미냐, 주근깨냐? 피부과 가면 이런 거 다 빼준다, 김희선이 선전하는 거 그거, 25만 원밖에 안 하는데 그거 사서 써라, 피부 진짜 깨끗해진다, 주름도 많냐? 나는 없다 등등 끝도 없이 저를 몰아댔습니다.


TV보고 있을 때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이제 슬슬 이 시간이 지겨워졌습니다. 이래서 멍청한 시간은 오래 보내면 안 되는가 봅니다.


"아 그냥 좀 냅두라고! 늙으면 주름 생기는 거 그냥 받아들이라고! 기미건 주근깨건, 있으면 좀 어떠냐고!" 저는 멍청한 사람답게 반말 반, 존댓말 반, 웃음 반, 짜증 반, 반반치킨마냥 마구잡이로 섞어 냅다 질렀습니다.


조금 전까지 부천 시민들에게 글쓰기가 얼마나 좋은지, 정서적으로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지, 열을 올리며 강의를 했는데.. 못배운 년이 되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그러고 보니 우리 사장님, 정말 피부 좋습니다"라고 예를 갖춰 칭찬의 말을 해줬으나, 그럴수록 더욱 싸이코패스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부디,

얼굴에 기미가 끼든 거미가 끼든, 그냥 내버려두시면 좋겠습니다.

TV 볼 때도 그냥 내버려두시면 좋겠습니다.

짝짜꿍을 하든 말든, 그것도 좀 내버려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글쓰기는 정말 좋습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벌써 이렇게 반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글쓰기가 이렇게나 좋은 것입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094149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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