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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Oct 30. 2023

책 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습니까?

거절의 미학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보름쯤 전, 네 번째로 탈고한 최종 편집 원고를 다른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그 출판사에서 출간한 소설을 인용한 부분을 보여주고 발췌 허락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출판사는 그 소설을 쓴 소설가에게 제 원고를 보냈고, 그렇게 편집자님과 저는 하염없이 소설가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소설가로부터 발췌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허락을 구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아 우리 편집자님이 한 번 재촉 전화를 했고, 그러고도 5일을 더 기다렸으나 끝내 답이 오지 않아 결국 우리 쪽에서 인용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탈고한 지 두 달이 지난 오늘 아침까지도 원고를 손봐야 했습니다. 발췌한 내용과 관련 설명을 들어내고 그 부분을 다시 채우는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분량도 제법 많아 며칠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또 퇴고 지옥에 빠져 지냈습니다.     


당연히 출간도 미뤄졌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지난 주말에 책이 나왔어야 했으나, 열흘 뒤인 11월 8일로 늦춰지고 말았습니다.     


전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남의 글을 인용할 때는 허락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를 당연히 예상해야 합니다.     


다만, 거절의 말을 미리 해줬더라면, 이 책에 관련된 사람들이 이렇게 열흘이 넘도록 스스로를 희망 고문하며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원고를 손보는 일을 열흘 전에 했었더라면, 아마 책은 예정된 출간일에 나왔을 겁니다.     


누군가 요청을 해올 때 상대방에게는 당연히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절에도 미덕은 있습니다. 요청한 사람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빨리 답변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절하는 상황이 불편해서 답변을 안 하고 있다가 끝내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거절 방법입니다. 요청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절만 당한 게 아니라 희망 고문 속에서 시간까지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설가님이 거절하는 게 미안해서 답변을 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상대의 시간을 낭비하는 방식으로 거절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전자이기를 바랍니다. 후자는 너무 나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갈머리가 간장 종지만 한 저는 오늘 그 소설가님의 방송을 찾아 들으면서, ‘언니, 왜 그랬어요?’라고 홀로 되뇌었습니다. 그의 소설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여전히 그의 글은 좋았으나 어딘가 조금 미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언니, 나한테 왜 그랬어요?     


*     


어제는 제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모교 대학신문에서 방송작가의 현실과 어려움에 대해 인터뷰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희 학교 졸업생 중에 방송작가 일을 하는 사람이 워낙 드물다 보니 저에게까지 요청이 온 것 같습니다.     


후배님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저는 오늘 거절 메일을 보냈습니다. 당일에 회신하면 너무 고민도 안 하고 거절한 것 같으니 하루 정도 묵혔다가 정중하게 거절의 말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답변이 왔습니다. 회신을 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빠른 거절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오히려 요청한 사람을 고마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여러분,

저를 빠르게 거절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거절 따위로 상처받지 않습니다.

거절이 빠르면 빠를수록 오히려 여러분의 신속함에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혹시 뭔가를 요청한다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황급히 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번엔 너무 늦게 내쳐졌으니, 가을 시나 읽으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야겠습니다.

ps. 최승자 시인은 이 글의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오해하실까봐.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24269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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