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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Dec 18. 2023

[일상쓰기] 첫 방송 출연과 패배의 감각


얼마 전에 고맙게도 제 책, <어느 날 글쓰기가 쉬워졌다>를 소개할 자리가 생겨 KBS에 다녀왔습니다. <말 트고 마음 트고>라고, 주로 해외 교포분들이 많이 듣는 방송인데, 3주 연속으로 방송이 나간다고 하니 제법 성공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원고를 녹음 전날 밤에 주는 바람에 늦도록 답변을 작성하느라 애를 먹긴 했지만, 고생한 만큼 방송은 만족스러웠습니다. 44년 차 베테랑 아나운서가 진행을 잘 해주셨고, 예전에 라디오 패널을 한 경험 때문에 떨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작성한 답변을 계속 고쳐가며 읽는 중입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유독 방송국에만 가면 사람들이 저를 실제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주름이 좀 많은 편이긴 해도 얼굴 자체가 노안은 아닌데, 유독 방송국에만 가면 저를 40대 중반으로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년을 앞둔 피디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제게 요즘 40대들의 관심사냐고 뭐냐고 물을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아, 나는 방송국에서 ㅈㄴ 노안이구나!     


전에 친하게 지낸 출연자 한 분은 제가 마흔일곱 정도 된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제가 서른일곱이었기 때문에 그 숫자는 꽤나 충격적이어서 뒷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제 외모가 아니라 행동 때문에 그런 거라며 저를 달랬습니다. 넉살 좋게 굴다가 한 번씩 무 자르듯 단호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능청스러워졌다가 결국에는 체념하는 듯한 태도로 쳐내는, 그런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태도 때문에 40대 중후반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아마 어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방송할 때 제가 말을 많이 하니, 진행자 분이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습니다. 보통 일반인 출연자는 40년 차 방송인에게 이런 지적을 받으면 주눅이 들어 방송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러나 중년의 태도를 지닌 저는 “아이고, 제가 너무 말이 넘쳤죠? 다음엔 시계 보면서 하겠습니다” 하고는 다음에도 역시 시계를 안 보고 준비해온 답변을 쭉쭉 말했습니다.     

 

원래 방송에서 시간을 조절하는 것은 진행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시계도 진행자가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붙어 있습니다. 일반인 출연자가 시계를 돌아보며 RT 체크까지 하면서 긴장하지 않고 차근하게 답변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두 번이나 시간을 확인하라는 핀잔을 들었고, 두 번째 지적을 받을 땐 저도 “오디오가 비는 것보단 말이 넘쳐서 편집하는 게 낫죵, 홍홍홍” 하고 받아쳤습니다.      


과거 라디오 작가를 한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이것은 방송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일종의 기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C가 자신의 분량을 확보하고 의도대로 방송을 끌고 가기 위해 말 많은 패널을 견제하는 것인데, 여기서 예예, 하고 끌려다니면 나중에 방송에 딱, 얼치기로 나오기 좋습니다.   

   

제가 비록 얼치기이긴 하나 자기가 쓴 책을 설명하면서까지 얼치기처럼 굴면 누가 제 책을 읽겠습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출연자들끼리 티격태격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벌이면 긴장감이 더해져서 방송이 훨씬 재밌게 됩니다.     


그러나 방송이 끝난 후 저는 바로 ‘선생님~’ 하면서 진행자에게 납작 엎드렸습니다. 바닐라 라떼도 대접하면서 전력을 다해 비위를 맞췄습니다. 그래야 프리랜서는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짓을 일상으로 하니, 방송국에서 몇 년만 일해도 사람이 닳습니다. 닳고 단 사람처럼 행동하니 방송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저를 40대 중후반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말만 번지르르하지, 사실 저는 실패한 방송작가입니다. 10년 가까이 원고를 썼고, 참여한 프로그램들은 큰 상도 여럿 받았으나 누구도 저와 계속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닳고 닳은 인간이라 부리기가 쉽지 않은 탓입니다.     


운도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같이 일한 피디님은 바로 승진을 하여 더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게 되었고, 그 다음에 같이 일한 피디는 프로덕션 대푠데 변태였고, 그 다음 피디는 몰래 다른 부서로 이직 신청을 한 바람에 개편 때 팀 전체가 날아갔습니다.      


끌어주는 선배 작가도 없습니다. 대부분 혼자 일했고, 팀으로 일했을 땐 바로 위의 작가가 저를 팀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자기가 그만둔다고 난리를 쳐서 결국 제가 그만뒀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지만, 제 성격을 이기지 못했고, 체력의 한계도 와버려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제 방송을 만족스럽게 해놓고도, 저는 돌아오는 내내, 그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겁니다. 제가 가고 싶었던 방송국에서 정년까지 무사히 살아낸 그들이 몹시 부러웠고, 일을 두 개, 세 개씩 같이 하자는 사람이 있는 작가에게 질투가 났습니다.     


제가 끝내 패배하고 말았던 그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멋지게 완주를 해내는 그들을 보니 저는 지독한 열패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쓰고 다른 사람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일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다음 달 월급을 불안해하지 않는 생활을 1년 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뭔가를 놓친 것 같다는 불안감에 주말에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최저 월급 정도는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제, 내가 속하고 싶었던 곳에서 정말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니 그렇게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나 봅니다.      


그러나 운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차갑게 식은 눈물을 닦고 결연하게 일어서서 부르주아를 척결하는 것은 아니고, 뭐라도 써야겠습니다. 투쟁!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289160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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