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자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 <상실의 시대>를 읽고는 엇, 굉장하다! 라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이어지는 소설들에서는 점점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상실의 시대>는 옛날 사람들만 아는 제목으로 요즘 사람들은 <노르웨이의 숲>이 더 익숙할 겁니다. 그러나 초딩 시절, 사촌 언니의 책꽂이에서 저 책을 본 순간부터 제겐 늘 <상실의 시대>였습니다.
사실 하루키는 이 번안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차례 제목 수정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책이 비틀즈 시대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제목도 비틀즈 노래에서 따온 것이기에 원제가 갖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반말로 시작한 관계는 나중에 절대 존댓말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제겐 이 책은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상실의 시대>입니다.
게다가 다른 나라 번안 제목도 다 자기들 마음대로이기 때문에(“나오코의 미소”(독일), “도쿄블루스”(스페인), “불가능의 발라드”(프랑스)) 너무 빡빡하게 굴지 않아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제 <어느 날, 글쓰기가 쉬워졌다>를 <어느 날 글쓰기가 싫어졌다>로 바꾼다고 한들 저는 더 찰지네, 하고 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제 비련의 소설 <개구리>를 <맹꽁이>로 바꾼다거나, 더 황당하게는 <반란의 시대> 같은 제목으로 번안한다면, 그건 좀 화가 많이 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하루키도 화가 났었나 봅니다. 그래도 이젠 다 <노르웨이의 숲>으로 나오고 있으니 화 푸시기를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실 제가 하루키의 소설을 싫어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자위 장면 때문입니다.
하루키 소설을 다 읽은 것은 아니니 하필 제가 그 장면이 들어간 소설만 골라 읽은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그것은 꽤 많은 권수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어서, 어느 순간부터 저는 또야?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됐습니다. 그 때문에 처음에 느꼈던 ‘엇, 굉장하다!’가 빠르게 시들어갔던 겁니다.
그러다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버닝>에서 유아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위하는 장면을 본 것을 기점으로 저는 유아인이고 하루키고 버닝이고 전부 다 꼴 보기가 싫어졌고, 그 후로 대체 하루키에게선 자위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오래도록 품게 됐습니다.
외국 친구들이 만든 작가 관련 밈에서도 하루키의 특성으로 꼽은 것이 masturbation인 것을 보면 그것은 저만의 의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저는 하루키, 하면 으... 하게 됐고, 이번에 그의 신작이 서점 매대에 쫙 깔렸을 때도 홀로 으.. 했습니다. 책을 읽은 친구에게 물어보니 이번 작품에도 역시 자위 장면이 있다고 하여, 으...
그렇게 하루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하루하루 강화해 가던 어느 날,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는 다르다는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거기에는 자위 이야기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번 읽어볼까? 하며 집어 든 책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입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첫 장을 읽자마자 제가 이 책의 아주 많은 곳에 줄을 그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고, 그것은 아카이브를 할 수준을 까맣게 넘어설 것이라는 것도 예감했습니다.
그리하여 the King of MB라며 하루키를 꺼리던 그 오랜 날들을 참회하며 그에겐 금단의 구역이나 다름없던 제 책꽂이에, 직접 제 두손으로, 그의 책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뭐, 책을 한 권 샀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정말, 에세이는 달랐습니다. 에세이에 나오는 모든 말들이 좋았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말입니다.
“장편소설을 다 쓰고 난 작가는 대부분 흥분 상태로 뇌가 달아올라 반쯤 제정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정신인 사람은 장편 소설 같은 건 일단 쓸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닌 것 자체에는 딱히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에게 제정신인 인간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문장의 힘이 엄청납니다. 글을 읽다 보면, 나도 얼른 내 이야기를, 내 소설을 한 권 쓰고 말리라는 생각이 단전에서부터 끌어 오르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이 말은 하루키가 한 것은 아니고 레이먼드 카버가 한 말을 하루키가 옮긴 것인데, 안그래도 자본주의 부적합자인 저는 이런 말을 들으면 예술 뽕이 우주 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래, 작가로 살기로 해놓고 이런 만족감, 이런 증거 한 번 남기지 못하면 이게 다 무슨 의미람!이라며 가난해질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세우게 되는 겁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올해는 그의 책을 다시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한 편 진지하게 써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작가를 꿈꾸는 분들이라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완전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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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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