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의 글쓰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리뷰
이 소설은, 현실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한 중년의 남자가 가상의 세계로 흘러갔다가 다시 현실로 튕겨 나온 후 왜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찾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가상의 세계로 흘러간 이유는, 그가 소년 시절 온 마음으로 사랑했으나 갑작스럽게 사라진 소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여전히 열여섯 살 소녀를 그리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징그러운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년은 이제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으나 여전히 소녀를 잊지 못해 가상의 세계에까지 가서 소녀를 만나 함께 일하고 매일 집에 바래다주며 계속해서 마음을 줍니다. 열일곱 살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그러다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다시 현실 세계로 튕겨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온 현실에서 남자는 다행히 성인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특수 소재로 만든 갑옷 같은 속옷을 입는 사람입니다. ‘총체적인 것’과 ‘가설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섹스를 못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을 듣자마자 남자는 다시 열일곱 살 그 시절로 돌아가 소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또렷하게 기억해냅니다. “네 것이 되고 싶어,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그런 후 소녀의 가슴과 소녀의 스커트 안쪽을 상상합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이것이 소년 시절 자신이 한 생각과 상상임을 강조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은 사십 대 중반의 아저씨입니다.
제겐 이 점이 몹시 기괴하고 징그러웠습니다.
만일 어떤 사십 대 중반의 아저씨가 열여섯 살인 제 딸에게, 나는 저쪽 세계에서 소년 시절에 너와 사귀었던 사람이라고 하면서 집에 데려다주겠노라고 한다면,
저는 딸이 한쪽 주머니에선 가스총을, 그리고 다른 쪽 주머니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내어 남자를 매콤한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딸의 얼굴을 영정 사진이 아닌 머그샷으로 보게 된 것에 안도하며, 푸른 수의를 입고 나온 딸에게 역시 너의 퍼스널 컬러는 파랑이야, 라며 격려의 말을 해줄 겁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그저 기괴하고 변태적인 중년 남자의 이야기라고 간단히 덮어버리기에는 제 마음을 바닥에서부터 흔드는 웅숭깊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 이런 식인 듯합니다.
제 신경을 집요하게 긁어대는 요소가 꼭 한두 개씩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소설을 치워버리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본질적인 것들이 여기저기에 범람합니다.
저는 그 넘치는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이 그렇습니다.
나는 그저 이 현실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뿐이다. 이 장소의 공기가 내 호흡기에 맞지 않는다, 라고 바꿔 말해도 될 정도로. ...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 라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그 깊은 위화감은, 아마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리라.
그리고 문지기의 이 말도 그렇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신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만.” 문지기가 말했다. “맞는 소리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처럼 날마다 가련하게 죽어 나간 짐승들 뒤처리나 하다 보면 육체 따위, 신전은커녕 그저 너저분한 폐가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리고 그런 궁상맞은 용기에 욱여넣어진 영혼 그 자체에 점점 신뢰를 잃는단 말이지. 그까짓 거, 사체와 함께 유채 기름을 끼얹어 확 불살라버리면 되지 않나 싶을 때도 있어. 어차피 살아서 고통받는 재주 말고는 없으니. 어때, 내 생각이 틀렸나?”
무엇보다 이 검박하고 웅장한 공상의 세계! 애처로운 단각수들! 존재와 세계에 대한 깊숙한 통찰! 그리고 기발한 어휘와 은유까지, 이 모든 것들이 저의 상상과 생각의 수준을 훌쩍 넘어섭니다.
거장의 글입니다.
그래서 하루키를 미워하는 동시에 경외하며, ‘썩을 할배’와 ‘위대한 마스터’ 사이를 큰 진폭으로 오가며, 마지막 한 장까지 악착까지 읽게 되는 겁니다.
그의 다음 책도 아마 그렇게 욕하면서 읽을 테지요.
그렇게 격변하는 감정 속에서 꾹꾹 눌러가며 읽느라 반납 기한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이 범상치 않은 날씨지만 얼른 뛰어갔다 와야겠습니다.
대체로 하루키처럼 많이 버는 작가의 책은 빌려보는 편입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다른 가난한 작가의 소설을 두 권 샀습니다.
‘썩을 할배’이자 ‘위대한 마스터’인 하루키시여,
선생이 가난해지면 그때 소설을 사서 볼 것이니 너무 섭섭해 마소.
그러나 내 생전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이러든 저러든 섭섭해 마소.
ps. 고야스 부인의 대파 두 뿌리 떡밥 회수 안 하셨소. 나 궁금해 죽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