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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Feb 12. 2024

돌싱의 흔한 명절 풍경

[노파의 글쓰기] 어린이와 돌싱만이 명절을 기다리지




신사 숙녀 여러분, 

다들 일은 덜하고, 돈은 더 많이 버는 새해 되시기 바랍니다. 


저도 명절 준비를 잘 마친 덕에 한층 더 편안한 연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떡국 같은 건 좋아한 적 없는지라 매번 주전부리와 책을 잔뜩 쟁여놓고 명절을 기다립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명절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린이들과 돌아온 싱글 레이디뿐일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설날은 밸런타인데이와 맞물린 덕에 개중에서도 최고의 명절이었습니다. 


부디 세상 사람들이 많이 많이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밸런타인데이 같은 게 두 달에 한 번 정도 생겨서 이 독거노인이 초콜렛 좀 싸게 먹게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이쯤 되면 너는 왜 느그집에도 안 간 것이냐,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가족이 명절에 둘러앉아 떡국을 먹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좁은 세계관을 갖고 계신 겁니다.


엊그제 촬영장에서 만난 분장사 선생님만 하더라도 홀로 해운대에 호텔을 예약해두셨다고 합니다. 그럼 저는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제가 사는 집과 이웃한 두 집 중 한 집도, 명절엔 남자만 내려가고 여자는 집에 있습니다. 그럼 저는 또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친한 언니 두 분도 각각 책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며 설날을 보냅니다. 두 분 다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는 이번 강의 촬영에서 만난 건축가님이 선물해주신, 굉장히 귀한 책입니다. 개인 출판이라 구매할 수가 없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2주 전에 가족들과 설 선물을 주고받고 갈비찜을 뜯어 먹으며 명절 의식을 마쳤습니다. 


왜냐면 명절에 저희 부모님은 조부모 중 유일한 생존자이신 외할머니가 계시는 부산의 요양원으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제가  함께 안 가는 이유는 저희 친척들은 제가 아직도 어느 집 며느리로 차례상을 차리고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부모님이 너의 이혼 사실을 숨기는 것이 서운하지 않으냐, 등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오래전에 제가 양친과 웃으며 합의한 내용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새끼가 돌싱인 걸 밝히는 게 싫고, 저는 가족 행사에 참여하는 게 싫습니다. 부모님은 자존심이 세고, 저는 시끄러운 게 싫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가는 굉장히 정열적이고 개성 넘치는 사람들로 이뤄져 있어서 만나기만 하면 부어라 마셔라 울고불고 난리 부르스를 추다가 마지막날 극적인 화해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당연히 돌싱 같은 건 얘깃거리도 안 되고 이건 뭐야, 싶은 가족형태도 있습니다.


자기들은 무슨 남미 사람들처럼 살면서 대체 왜 내 이혼에만 별스럽게 구는지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암튼 그렇습니다. 

이것은 저의 설날 아침입니다. 흙처럼 뿌려졌지만, 파마산 치즈가루입니다.

다행히 저는 스물다섯에, 윤선생님이 허락한 나이로는 스물셋에 결혼을 하면서 이 기 빨리는 드라마에서 빠르게 페이드아웃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어렵게 잡은 기회를 돌싱이 됐다고 하여 제 손으로 져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집은 명절마다 부모님은 남미 드라마를 찍으러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 저 홀로 북쪽에서 초콜렛을 녹여 먹으며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고된 명절 노동을 마치고 올라온 이번 월요일에는 제가 경주로 내려갔습니다. 윗집 어린이가 다리에 보다 강력한 엔진을 달고 돌아와 뛰어다닐 것이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또 얼마 전에 찍은 강의 촬영으로 이번 달 생활비를 벌충했으므로(그래서 저토록 밝게 웃고 있는 것인데) 다시 가난이 도래하기 전에 냉큼 숙소와 차표를 결제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오늘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경주에서 봉분들 사이를 거닐며 죽음과 시체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삶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시면서 새해 연휴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345268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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