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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Jun 20. 2024

병든 자여, 내게 오지마라

위스키에 관하여




코스트코나 트레이더스 가는 걸 아주 좋아한다.

이런 창고형 마트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독한 섬유유연제 냄새와 기름진 음식 냄새가 섞인 냄새. 내가 미국 냄새라고 부르는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며 주류 코너를 얼쩡거리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엊그제 생일이라 가장 좋아하는 걸 하러 킨텍스 트레이더스에 갔다.


오늘의 시음은 예거마이스터다.

이른바 앉은뱅이 술.

이제 가야지, 하고 일어서면 그제야 취기가 돌아 사람을 다시 주저앉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하향이 나고 단맛이 강해 여자들이 좋아하는 술이다.

나는 달아서 썩 좋아하지 않지만 입가심으로 한 잔 마셔보았다.


시음행사할 땐 공짜 술 좋아하는 나같은 인간을 물리치기 위해 보통 토닉을 섞어준다.

더 맛없다.

그들은 나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사실 시음 한 잔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다.

그런 짓은 환갑 넘어서 해도 늦지 않다.

오늘은 친한 친구의 생일 선물을 사러 온 것이다.


내 주변엔 6월생들이 많다.

그러면 나는 우리가 수정된 날을 생각한다.

10개월 전. 8월. 한여름.

우리의 엄마아빠들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그땐 에어컨도 없을 때인데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열정이 아니라 광기 같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술을 고른다.



발렌타인 싱글몰트 12년을 살까, 15년을 살까…

마음을 단단히 먹고 15년을 고른다.

글렌버기15는 일명 ‘신동엽 위스키’로 불리는 술로, 맛있단다. 나도 안 먹어봤다.

한 잔 얻어먹어야겠다는 심산으로 고른 것이다.

그걸 옆에서 다른 시음 행사를 하던 언니가 봤다.


“고객님, 조니블랙도 시음 한 번 해보세요~”

언니는 내가 십만 원 안짝의 위스키는 턱턱 사는 큰손인 줄 알았나보다. 그러나 어른이 부르는데 안 가는 건 예의가 아니므로, 갔다.

“원액으로 드릴까요?”

마트에서 위스키를 원액으로 주는 건 VIP 대접이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VIP답게.


평일 오전부터 마시는 공짜 조니블랙은 엄청나게 맛있었고, 컵을 핥아먹고 싶었고, 그러나 VIP의 품위가 있어 그러지 못했다.

나의 아쉬움을 눈치 챈 언니가 이번엔 칵테일로 드시겠냐고 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왜 섞어도 맛있냐, 하며 홀랑홀랑 다 마셨고, 결국 조니블랙도 사고 말았다.

내가 먹을 건 아니고, 아빠 주려고.

불자는 시음만 한다.


그렇게 가방 안에 글렌버기 한 병과 조니블랙 1리터 짜리 한 병, 마트 언니가 서비스로 준 토닉워터 한 병과 내 물통, 그리고 책 한 권과 치약 통을 이고지고 오늘 여정의 마지막인 양꼬치 집을 향하는데…

태양은 작열하고 어깨는 부서질 것 같고.

무슨,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이상한 사람들과 엮이는 일이 많아서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예수님도 아닌데 왜 병든 자들이 자꾸 나한테 오지?”

이제 보니 내가 병든 자여서 그랬다.

내게 병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아직도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내 것도 아닌 병들을 노려보는 중이다.

내가 너흴 어떻게 업어왔는데!

나는 먹으면 안 된다는 거지…

나는 초콜릿이나 먹으라는 거지…

처음으로 초콜릿이 하찮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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