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고 새지 않는 몸 구합니다

by NOPA



KakaoTalk_20240811_180957805_03.jpg?type=w1


옛날에 방송국에 다닐 때 한 피디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본 적이 있었다.


180 정도로 적당히 큰 키에 군살 없는 체형, 헬스장에서 약 먹고 키운 근육이 아니라 달리기나 수영으로 촘촘하게 다져놓은 듯한 잔근육, 전체적으로 날렵한 느낌을 주면서도 다부진 몸.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몸에 가까웠다.


그때 내가 한 생각은 “저런 몸으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일상이 얼마나 편리할까?” 따위의 것들이지만, 옆자리에 앉은 부장님 눈에 그 생각까지 보일 리 없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오옹? 좋아하는 거 아냐?”


미투 운동이 있기 전이라 나이 든 상사들이 무엇이든 말하던 시절이다.


정신 나간 늙은이, 난 저 사람의 몸을 좋아하는 거라고!


그러나 이쪽이 더 정신 나간 대답 같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그렇게 멋진 몸을 보면, 몸의 주인이 나를 통째로 삼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통째로 삼킨 그는 나의 정신으로 살고, 나는 그의 몸으로 사는 거지. 완벽한 한쌍이다.


그러나 누구도 나의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정신을 원하지 않으므로 나는 내 정신, 내 몸으로 사느라 에로가 많다.


사실 내 몸도 그리 형편없지는 않다.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다리 근육도 이만하면 쓸만하고 복근도 있고 뒤통수도 납작해서 잘 때도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잘 수 있다.


문제는 내분비계 쪽이다.

예민하기 짝이 없다. 조금만 피곤해도 어디 한 군데가 헐고, 염증이 생기고, 피를 흘리고 줄줄 샌다.


처음엔 코피와 다래끼 같은 걸로 시작하다가 그래도 일을 쉬지 않으면 염증은 위장과 생식기 쪽으로 내려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생리불순은 일상이고 치질은 고등학교 때부터 안고 살았다. 그중 제일 싫어하는 병은 방광염이다.


ㅆㅂ 방광염.

이 병은 거의 5분 간격으로 발작적인 요의를 느끼게 하는데, 소변을 보면 하반신이 마치 불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남성 질병으로 하면 요로 결석이 이에 비견될 수 있을까?


원인은, 내분비계 질병이 대부분 그렇듯, 과로와 피로다.

피곤해서 내 하체가 불타는 거란다.

나는 돌아버린다.

KakaoTalk_20240811_180957805.jpg?type=w1


그런데 이 악랄한 질병이 지난 금요일에 느닷없이 발병했다.


몸뚱이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냐,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냐?


나는 울면서 상비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내분비계 질병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몇 번의 죽고 싶은 순간을 넘긴 후 내 약통에는 다래끼약, 치질 연고, 호르몬 약, 그리고 방광염약이 상시 구비돼 있다.


그러나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방광염약은 똥약이므로 매번 룰렛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운이 좋으면 약 한 통으로 끝나고, 운이 나쁘면 두 통을 먹어도 하체는 계속 불탄다.


이번엔 운이 나빴고, 약은 다 떨어졌는데 하체는 여전히 불타고 있으므로 긴급히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병원을 찾았다.


부디 가는 동안 지리지만 말아 달라고, 방광에게 진지하게 간청한 후 불타는 하체를 어기적어기적 움직였다.


그런데 일요일에 문을 여는 병원이라니. 고맙기는 하지만 대체 의사에게 무슨 사정이 있기에 일요일에도 진료를 보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빚이 많나?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의사에게 분명 빚이 많다는 확신이 들었다. 온갖 주사 광고가 접수대고 벽이고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의사는 나이든 남성이었고, 방광염 같은 건 걸려보지도 않은 사람답게 나의 고통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우리 병원에 자주 온 어머니한테는, 방광염이라고 하면, “중전 대비마마처럼 계셔야 합니다” 이 한마디만 합니다. 중전 대비마마처럼 있는 게 뭐예요? 집안일도, 운동도, 전부 하녀에게 맡기고 가만히 계시라는 거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릿저릿한 감각을 겨우 참고 있던 나에겐 집안일을 대신해줄 하녀도 없거니와 이런 시답잖은 아재 개그에 웃어줄 여력도 없었기에 뚱하게 있었고, 의사는 의사대로 짜증이 나서 우리의 첫만남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며 끝났다.


다행히 약이 잘 듣는다.

지금은 의사의 썩은 개그에도 웃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내분비계가 잘 기능하는 몸으로 살면 얼마나 웃을 일이 많을까?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


얼마 전엔 생리불순이 지겨워 자궁적출술을 알아봤더니 자궁을 떼면 요실금의 위험이 커진다고 하여 피냐 오줌이냐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차에 방광염을 맞이했고, 자궁이고 방광이고 다 뜯어버리고 텅 빈 몸으로 살겠다, 했다가 이내 그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에 가깝다는 깨달음을 얻어 뜯었던 장기들을 도로 다 붙여 놓았다.


흐르고 새지 않는 잘 닫힌 몸이 무척이나 부럽다.

그런 몸의 주인들은 복 받은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541315411

#노파의글쓰기 #어느날글쓰기가쉬워졌다 #글쓰기 #글잘쓰는법 #노파 #김수지작가 #에세이 #문해력 #어휘력 #북스타그램 #책리뷰 #서평 #감성글 #생리불순 #방광염 #치질 #건강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주 최강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