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에세이] 미싱 돌아가는 소리와 선풍기 소리
#낮잠
어제는 다섯 시간 정도 깨어 있었다. 9시간은 침대 위에서 잤고, 10시간은 방석 위에서 잤다. 9시간은 밤잠, 10시간은 낮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말 몸이 안 좋았나 보다. 자란다고 19시간을 자다니.
굳이 방석 위에서 잔 이유는 낮잠 자면 소 된다, 하는 오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야 잠의 신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낮잠을 이 정도로 많이 자면, 정신이 무의식으로 흘러간 사이 침입자가 들어오면 어쩌나 불안감이 든다. 그래서 카이저 세븐을 옆에 두고 잤다.
카이저 세븐은 내 가스총 이름이다. 내가 지은 게 아니다. 너무 중2병 걸린 것 같잖아. 내가 지었다면 니노 막시무스 카이저 쏘제 쏘냐도르 앤 스파르타라고 지었겠지.
#불안
가스총을 옆에 끼고 자야 할 만큼 불안감이 심해진 건 7년 전, 오피스텔에서 처음 혼자 살면서부터다.
한밤중에 헬멧을 쓴 남자가 두 번이나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후로, 그리고 경찰에게서 일이 벌어지기 전엔 사실상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아무것도 없다는 얘길 들은 후로, 그때부터 이 침입자와 가상의 전투를 치르느라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나는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소파고 침대고 손이 닿는 곳에 늘 식칼을 한 자루씩 두었다. 어차피 우리나라는 정당방위를 인정 안 해주니 칼자루에 붕대를 감는 등 디테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한 번은 에어컨 수리 기사님이 와서 소파를 옮기는데 식칼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바람에 “아니, 이게 왜 여깄어?” 하며 괜히 발연기를 한 적도 있다.
#선풍기
그러나 이곳은 일산이고, 내 양쪽 집에는 애기 엄마와 노년의 싱글레이디가 살고 있고, 내 손이 닿는 곳엔 카이저 세븐이 있으므로, 그래서 낮잠을 10시간이나 잤던 것 같다. 온도가 35도까지 올라가는 날 선풍기만 틀고서.
그런데 생각해보면, 80년대 이전 출생자들은 전부 에어컨이 없는 시절에 태어났다. 그 연약한 신생아 시절도 선풍기에 의지해 한여름을 났다. 요즘 아이들과는 달리 태생부터 강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시절 내가 여름에 한 일이라곤 엄마 옆에 누워 낮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그럼 엄마는 한 대밖에 없는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주기도 하고 부채를 부쳐주기도 하면서 막내딸이 깨지 않고 계속 자도록 살폈다. 내 평생 가장 안전하고 충만하던 시절.
그 시절 아빠는 밖에서 운전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네 식구가 먹고살기엔 충분한 벌이가 아니었으므로 엄마는 항상 집에서 뭔가를 했다. 당시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에게 가장 만만한 부업은 미싱 일이었다.
그래서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엄마가 들들들 돌리는 미싱 소리와 돌돌돌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겨울에도 미싱을 돌렸을 텐데 내 기억 속 유년시절은 언제나 여름이다. 앞뒤로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새댁은 부지런히 미싱을 돌리고 얼라는 배 까놓고 자고.
엄마한텐 고생스러운 시기였겠지만, 전후 사정 무엇도 알 필요가 없던 나로서는 꿈같은 유년시절이었다
늘 먹을 것이 있고, 늘 엄마가 옆에 있었으니 그 시절 내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이 다 충족된 상태, 행복의 완성과도 같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더위에 10시간씩 낮잠을 자고 나니 그 시절이 떠올랐다. 비록 방광염에, 부정출혈에, 온갖 염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는 지금 행복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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