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서평] (고우영, <삼국지>)
* 마지막 글귀 출처 수정(중요)
얼마 전에 게시물에 사용한 그림이 고우영 작가의 것임을 알고 그의 대표작 <삼국지>를 찾아보았다.
그렇다, 아직까지 삼국지를 읽어본 일이 없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남들보다 교양 수준이 낮은 탓이고, 또 언제나 더 읽고 싶은 책이 있었기에 순위가 밀렸을 뿐이다. 무려 39년이나.
어제도 딱히 삼국지가 읽고 싶었다기보다는 그저 고우영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엄청나게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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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글이 아니라 말을 읽는 장르다. 그런 탓에 <고우영의 삼국지>에는 문장을 천천히 짚어나가며 사유하고 아름다움을 곱씹어 보는 즐거움은 없다.
따라서 신형철의 “글은 느리게 하는 말”이라는 정의에 동의하기 어렵다. 글과 말은 전혀 다른 장르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우영 작가는 저잣거리의 말을 한다. 그것은 ‘작가의 말’에서부터 알 수 있다.
“내가 만든 향료와 설탕을 뿌려 그것으로 정액을 삼아 아기를 하나 낳았는데, 그것이 <고우영 삼국지>라 불리우는 이놈이다.”
글을 다루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쓰지 않을 것이다. 너무 남사스러우니까.
여기엔 고우영이 8, 90년대를 풍미한 작가인지라 인식 수준도 그 시절의 것인 탓도 있다. 그래서 책 중간중간 지금 기준에서는 걸러야 하는 말들이 유머로 소비되고 있는데 전혀 안 웃기다.
거기다 그놈의 아재 개그….
그땐 이런 거로 웃었단 말이지? 20년 만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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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었을지언정 고우영의 말과 그림에는 독자를 휘어잡는 강렬한 힘이 있다. 대화 사이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아까워 허겁지겁 읽어나가게 된다.
일단 65권짜리 중국 역사서를 10권의 만화로 압축시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방대한 내용에 통달해야 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겐 그의 해석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유비는 황손이라는 것 말고는 지략도, 체력도 없는 바보고(고우영은 ‘쪼다 유비’라고 부른다), 장비는 힘만 센 무식한 동네 건달이며, 진짜 멋쟁이는 관우로 표현되는데, 읽으면 설득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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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고 한동안 ‘무상無常’이라는 단어에 푹 담겨 있었다.
모두가 다 떠내려갔다.
그 대단한 황제도, 백정의 딸로 태어나 나라를 쥐고 흔들던 황후도, 나는 새도 떨어트리던 간신도 모두. 죽을 땐 다들 어찌나 비루하고 보잘것없던지.
이런 걸 보면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권력이 사람을 잡아먹으며 영속하는 것 같다. 건전지 갈아 끼우듯 주기적으로 새 사람으로 교체해 가며 권력은 지금껏이어져 온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권력 한 번 잡았다고 기고만장들 하지.
정치인이 미우면 자기 할 일 하면서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10년 안에 다 떠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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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로 마무리를 하면 되겠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올 것이다.”
<도덕경>, 노자(X)
-> 노자의 <도덕경>에 나왔다고 서양인들이 잘못 알고 퍼뜨린 말 (O)
ps.
어제 이 글을 보신 동양철학 강사님께서 중요한 지적을 해주시기를, 마지막 글귀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양인들이 <논어>의 한 문구를 저렇게 오역했다가, 이후엔 일본 속담이라고 했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소설 <타나토노트>에서 노자가 한 말이라며 소개한 이후 겉잡을 수 없이 와전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말을 인용할 땐 "노자의 <도덕경>에 나왔다고 와전된"이라는 주석을 달아주셔야 합니다.
참으로 멋진 SNS 세계입니다.
지적해주신 강사님께 감사드리고,
지식인 여러분,
앞으로도 제 글에서 틀린 내용 있으면 혼자만 알지 마시고 제게도 꼭 알려주세요, 집단지성이 필요한 인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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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576425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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