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성 여행 6일차 : 태백산맥 문학관
* 광기의 사랑
벌교에 도착하여 받은 첫인상은, 이곳은 꼬막과 조정래가 먹여 살리는 도시구나, 하는 겁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태백산맥>이 있습니다.
<태백산맥>에 나온 건물과 지명을 따라 문학 거리가 조성돼 있고, 태백산맥 공원이 있고, 길 이름이 아예 ‘태백산맥 길’이거나 ‘조정래 길’입니다.
보성여관 역시 ‘태백산맥 속 남도여관으로 등장하는’으로 소개돼 있습니다. 당연히 여관 내에는 조정래 작가와 <태백산맥>에 관한 것들이 전시돼 있고, 아예 <태백산맥>을 필사할 수 공간까지 따로 하나 마련해놓았습니다.
이쯤 되니 광기다, 싶으면서도 우리나라에도 작가를 이렇게 극진히 대접해주는 도시가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러나 <태백산맥>을 고등학교 때 읽어서 내용이 가물가물한 탓에 도시가 바치는 이 극진한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침이 밝자마자 태백산맥 문학관부터 찾았습니다.
* 남다른 탄생 이야기
박물관에서 전시물을 이렇게 집중해서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곳에 적힌 모든 글자를 한 자 한 자 곱씹어가며 읽었습니다. 소설 너머의 현실이 더 소설 같아서, 대체 무엇이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쓰게한 것인지, 그 집요한 마음에 울컥해졌습니다.
대원사에 있을 때, 내일 벌교에 간다고 하니 주지 스님이 태백산맥 문학관에 꼭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정래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도대체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선암사 부주지의 아들로 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지리산을 열 번도 넘게 오르면서 소설을 준비했고, 수십 년 동안 하루에 10시간씩 앉아서 글을 쓴 사람이다. 여기(절) 있는 우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짜 수행자다.
작가가 스님의 아들이라니. 절에서 태어났다니. 난생처음 듣는 탄생설화에 반신반의했는데, 문학관에 와서 보니 스님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벌교가 원체 항일 운동이 거센 지역이다 보니 일제는 벌교의 정신적 지주인 불교를 흔들기 위해 승려들을 대거 결혼시켰고, 그때 선암사의 부주지도 결혼을 해서 조정래 작가는 선암사에서 스님의 자식으로 태어났던 겁니다.
역시 대작가는 탄생부터 남달랐습니다.
* <태백산맥>과 빨갱이
<태백산맥>은 우리가 ‘빨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근원을 파헤치는 소설입니다.
그런 소재는 지금도 쓰기 무섭습니다. 인민군의 죽창을 본 적도 없으면서 여전히 빨갱이 몰이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태백산맥>은 무려 1980년대에 쓰인 소설입니다. 국가가 자국민을 빨갱이로 몰아서 도시 하나를 탱크로 밀어버린 일이 벌어지던 때입니다.
그 시절에 무려 6년간 빨치산에 관한 소설을 썼으니 목숨을 걸고 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정래 작가는 연재가 끝난 후로도 오랫동안 살해 협박과 고소 고발을 당했고, 무려 11년간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 숙명적 글쓰기
시작부터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자료가 없어서 빨치산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작가는 지리산을 열두 번을 종주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가며 무려 4년간 직접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열정이라는 말로는 다 담아내 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제대로 기록하고 알려야 한다는, 신념과 숙명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글입니다. 그리고 이 신념을 소설가가 가졌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만일 작가나 학자가 이런 신념을 가졌다면, 그 글은 진작에 금서가 되었을 것이고, 글쓴이는 벌써 끌려가서 다시는 글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야기는 소설의 형태로 기록됐기에 빨치산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해석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소화와 염상진과 정하섭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그 이야기가 8백만 부 이상 팔려나가지 않았다면, 전라도 지역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심한 차별과 핍박 속에서 고통 받았을 겁니다.
* 얼굴
그러나 이 엄청난 이야기가 불러일으킬 파장은 한 개인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거기다 검찰이 작가의 국보법 위반에 관해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은 겨우 2005년의 일이니 작가는 40대부터 60대까지를,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서 무려 30년 이상 고통받으며 살았던 겁니다.
작품을 쓴지 6년 만에 폭삭 늙어버린 작가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감당해야 했던 시련의 기록을 보면서, 도시 전체가 그에게 보낸 지극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종소리
그리고 또 하나 생각했던 것.
6년 동안 매일 10시간씩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필요를 해결해줄 사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종을 보면서, 그것이 울릴 때마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와 작가의 필요를 해결해주던 한 사람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작가의 아내일 겁니다. 그 역시 시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결혼은 위대한 사람과 해야지, 라고 생각한 적도 있으나, 종을 보는 순간 위대한 사람의 아내로 사느니 그냥 허접한 나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또한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그 모든 위대한 일이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중년에 꼭 불행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작품도 얻고 한 사람의 신뢰도 얻었으니, 어찌보면 인생이 이보다 완벽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ps. 이 돌은 결혼 후 환속한 아버지가 평생 지니고 다니시다가 작가에게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라고 합니다. 자연석 불상이라는데, 대체 어디에 부처님 얼굴이 있는지 제 눈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때가 많아서 그런가봅니다. 아마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큰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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