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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귀촌] 해남 33-34일 차: 반전 추

여자들의 여행-청산도, 대흥사, 우수영

by NOPA


2025.10.7~10.8 해남 23~25일 차

#1. 반전 추석


해남에서의 생활은 하루가 마이너스면 다른 하루는 플러스로 흘러간다.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그러하다.


어제는 숙소 사장 내외의 무심함에 서러움이 터졌다(마이너스 1) 오늘 숙소 사장은 내 옆방에 새로운 손님들이 올 거라고 했고(마이너스 2), 시끄러울 거라고 했고(마이너스 3), 그 손님들이 내 방 앞까지 이어진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울 거라고 했다(마이너스 10)


지옥의 예고나 다름없는 사장의 통보를 들은 후 해남도 싫고 귀촌도 싫고 세상 모두가 싫어진 그 순간에 프로그램에서 만난 현지인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같이 청산도에 가자고 했고(플러스 10), 숙소까지 나를 픽업하러 왔고(플러스 1), 그녀의 친구까지 셋이서 우리는 서편제의 공간을 함께 걸었고(플러스 5), 마지막엔 회까지 얻어먹었다(플러스 30).


나의 새 친구들은 나를 숙소로 데려다주는 길에(플러스 1) 내 방에서 명상을 가르쳐줄 수 없냐고 했고(흠..), 명상 후 방에서 자고 갈 수 없겠냐고 했다(마이너스 1). 내가 얻은 플러스에 비해 너무 작은 마이너스였기에 큰맘 먹고 방으로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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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방음도 안 되는 방안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떠드는 소음에 꼼짝 없이 시달릴 뻔했는데, 여자 두 명이 마치 구원자처럼 나를 청산도로 인도했던 것이다.


분명히 오늘 아침 8시까지만 해도 지옥이 예정돼 있었는데, 고작 30분 만에 천국으로 가는 차 안에 앉아서 나는 내게 일어난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지옥에 있어야 할 내가 왜 완도대교를 넘어 청산도로 가는 배에 올라타고 있는지, 인생이 부리는 조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나의 새 친구들은 독실한 크리스챤이고 나는 독실한 불자라서 우리는 각자의 하나님과 부처님이 주신 개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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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의 배경이 된 곳으로, 섬의 모든 곳에서 발산되는 놀랍도록 선명한 색감은 마치 이 곳이 삶의 가장 빛나는 정수를 담은 곳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빛나기만 한 곳은 사람을 조금 지치게 하는 법이어서 적도의 태양처럼 발산하는 열기에 우리는 조금씩 녹아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순간 또 다시, 마치 선물처럼 선량한 공원 관리인 할아버지가 나타나 차로 우리를 섬의 이곳저곳으로 데려다 줬다.


할어버지의 등장과 그가 베푼 호의는 이 섬엔 밝고 긍정적인 것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고, 할아버지도 (상대적으로) 젊은 세 처자와의 동행을 무척이나 즐거워하셨으며, 우리는 완도의 수산시장 거리에서 생명력으로 꽉 찬 회를 먹으며 밤바다가 부딪혀오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환상의 섬 투어를 완벽하게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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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까지 얻어먹은 나는 그녀들을 기꺼이 내 숙소로 안내했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가볍게 묻어버릴 정도의 거센 수다의 장을 열었다.


누구도 술을 마시지 않고 누구의 뒷담화도 하지 않았는데, 여자 셋이 모이니 세상 모든 것을 주제로 온갖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원 이혼 이력이 있고, 전원 사선을 넘어본 적이 있고, 전원 화장 따윈 하지 않는 기동성 최고의 인물들이었기에 나는 지옥이 예고된 곳에서 내 인생 최고의 추석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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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늘 하던 개인주의자의 말, “오늘은 혼자 있을게”를 꿀꺽 삼키고 나의 새 친구들과 함께 대흥사를 찾았다.


대웅전에 데리고 가서 좌선하는 법을 알려주고, 서산대사를 소개시켜 주고, 일지암에 올라 초의선사가 살던 암자 툇마루에 앉아 지금은 이 암자에 되게 잘생긴 스님이 산다는 중요한 정보를 흘렸다.(5월에 왔을 때 봤다)


바람결에 묻어온 금목서 향을 맡으며 우리는 잘생긴 스님의 얼굴을 잠시 상상하다가 이내 속세로 내려가 게걸스럽게 닭을 뜯었다. 그래, 이 맛에 내가 출가를 못 하지. 해남 대흥사 근처에는 닭 코스 요리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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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수영 울돌목으로 향했고, 나는 그곳의 낙조를 보며 이것은 정말이지 삶의 반대 영역에 속하는 풍경이라고 느끼며 한동안 그 반대의 것을 생각했고, 이순신 장군을 생각했고, 임진왜란 때 그가 썰어버린 왜놈의 목이 몇이나 되는지 아냐고 물었을 때 친구들은 내 얼굴이 마치 우는 것 같았다며, 이순신 장군을 대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진지하게 물었고, 나도 진지하게 답했다.


그 양반, 마흔 넘어서 풀린 양반이야, 나한테 희망을 준다고.



나는 정말 이순신 장군의 늦게 핀 기백이 너무나 좋고, 나도 장군님처럼 적의 목을 거침없이 썰어버리고 싶었고, 낙조 때 울돌목은 왜놈 따위는 죽어서도 닿을 수 없는 피안의 세계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역시 나는 삶의 정수를 쨍하게 보여주는 청산도의 바다보다 왜놈의 피로 물든 것 같은 낙조 때 울돌목이 좋다고 느끼며 하염없이 핏빛 바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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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숙소로 복귀한 아저씨 중 한 명이 컴백 선물로 내 방문에 국화빵을 걸어뒀다고 했다. 집에 와보니 빵은 없고 종이봉투만 처참하게 찢긴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랑이 개놈 녀석이 먹어치운 게 분명했다. 그런 불한당 짓을 저질러놓고 개는 명랑하게 내게 뛰어와 배를 뒤집어 까보였다.


망할 개 녀석. 하나만 남겨주지. 맛있드냐? 개의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국화빵을 방문에 걸어놨다고 할 때부터 그것이 개놈의 차지가 되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저씨도 처음부터 개에게 주기 위해 빵을 내 방문에 걸어놨는지도 모른다.


개는 세상 행복해 보였고 나도 무척이나 행복하므로 기꺼이 개를 용서했다. 지난 이틀은 내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으므로 개가 먹은 게 내 손가락이었어도 용서해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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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3356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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