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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귀촌] 해남 32일 차: 명절의 서러움

가련한 것들

by NOPA


2025.10.06 해남 32일 차

#1. 미워하는 마음과 옹졸함


내가 열흘이나 되는 추석 연휴를, 굳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숙소 사장 가족만 있는 곳에 남아 있기로 한 이유는 사람들 없을 때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열흘 중 이틀은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아팠고, 이틀은 사장 가족들이 너무 시끄러웠고, 오늘은 사장이 내 방 앞 테라스에 빨래를 넌다고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불안병이 도지고 말았다.


한 면이 통창으로 돼 있는 방안에서,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감기 기운에 자다깨다를 반복하고 있는 와중에, 남자가 내 방 앞을 서성이다니! 펜션을 10년 넘게 운영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돼 있을 수가 있나!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장은 나를 고문하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2층 방을 워커 발로 즈려밟으며 오후 내내 무거운 것들을 옮겼다. 나는 불안증과 층간소음 트라우마로 지옥 같은 추석 오후를 보냈다.

길 끝에 있는 이 폐가를 보면 언제나 쓸쓸한 기분이 든다


#2. 만만치 않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와 2층을 노려봤다. 마침 사장 부인도 빨랫감을 들고 방을 나왔왔다. 추석에 혼자 있는 손님이 마당에 서서 미친 사람처럼 2층을 노려보고 있으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만도 하건만, 사장 부인은 인사도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부인을 불러세워서 2층에선 대체 뭘 하는 건지, 여기 사장은 왜 여자 혼자 지내는 방 앞에다가 빨래를 너는 건지, 불편하고 불안하고 위협적이니깐 못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직접 얘기하시면 될 텐데”라고 답해서 싸울 뻔했다.


화를 삭이려 산책을 나가는 길에 차를 타고 귀가하는 사장과 마주쳤다. 사장이 “방에 계셨어요?”라고 웃으며 말을 거는데 “네” 한 마디만 시큰둥하게 뱉고 가버렸다.


방에 계셨냐니, 그럼 추석날 이 촌구석에서 방에 안 있으면 어딜 가겠어, 마트도 다 문을 닫는 마당에. 그러는 당신들은 명절에 왜 아무 데도 안 가는 건데?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나는 산책하는 내내 그가 한 말을 잘근잘근 곱씹었다.

자세히 보면 집이 녹색 피를 토하는 것 같다.


사장 가족이 전부 미웠다. 방음도 전혀 안 되는 옆방에 사람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연휴 내내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떠든 게 미웠고, 추석인데도 30분 거리에 있는 본가도, 처가도 가지 않는 무도함이 미웠고, 옆방에 나 혼자 있는데도 추석 잘 쇠란 말 한마디 않는 무심함이 미웠다.


결국 이 세 번째가 모든 미움의 원인이었다. 가족도 뭣도 아닌 주제에, 추석 명절에 혼자 있는 나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사장 가족을 미워하는 중이었다.


그제야 자기들끼리만 맛난 거 먹는다고 귀촌 가족들에게 골을 부리는 시골 할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오, 시골에 한 달 살더니 시골 사람이 다 되었구나!


게다가 나는 명절에 집에 안 간다고 누구를 무도하다고 할 처지가 아니다. 나야말로 무도함의 끝판왕이니까.


그러나 원래 별것도 아닌 것들이, 너무 소소해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런 것들이 사람 마음을 바닥까지 흔드는 법이다.


그러니까, 내가 기침 소리를 그렇게 냈는데, 일주일 내내 나 혼자 있었는데, 하다못해 감나무에서 감이라도 몇 개 따와서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죠~ 하면서 내밀면, 명절인데 이 정도 소리는 나죠~ 하면서 고맙게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쪽에서도 먼저 할 수 있는 일이다. 초콜릿 몇 개 내밀면서.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러나 저쪽은 셋이고 여기는 즈그 집이니,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맞지 않냐며 옹졸하게 구는 것이다. 나도 나의 옹졸함을 어찌할 수가 없다.


#3. 가련한 것들

산책길에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를 만났다. 자꾸 나를 쫓아왔다. 놀라고 무서워서 누구에게라도 의지하려는 것 같았다.


도로에 있다간 차에 치일 것 같아 길가에 폭신해 보이는 원단 더미 위로 고양이를 옮겨 놓았다. 고양이는 가볍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거리 생활을 버티기엔 너무 나쁜 조건이다. 의지처를 찾지 못하면 금방 죽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고양이는 원단 더미도 뿌리치고 엥엥 울면서 어미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모른 척하고 발길을 돌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에나 나보다 더 가련한 것들이 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내가 누굴 원망하고 서러워하는 마음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살아남아 이 동네 짱이 되거라

숙소로 돌아오는 데 입구 쪽에 불이 크게 번지고 있는 게 보였다. 놀라서 숙소 사장한테 전화해서 지금 입구에 불난 거 아냐고 했더니 자기가 낸 거라고 했다. 쓰레기를 태우는 중이라면서.

다시 누군가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3292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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