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5. 해남 31일 차
#1. 감기
9월 말부터 시작된 환절기 감기가 지독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원래 낮잠을 20분 이상 자지 않는데, 오늘은 20분 단위로 맞춰둔 알람을 세 번쯤 다시 맞추면서 오후 내 잤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알람을 한 시간씩 넉넉하게 맞추면 되지 않나 싶지만 잠에 좀 인색한 편이다. 알람을 한 시간씩 맞추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았다. 갑자기 내가 불쌍해진다. 그러나 다음에도 나는 또 알람을 서너 번씩 다시 맞추면서 변태적인 안도감을 느끼겠지. 인정해라, 너는 강박증 환자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뜯어내어 세 시쯤 집을 나섰다. 약속 시각이 다섯 시여도 세시에 집을 나서 45분을 걸어 닿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 후 4시쯤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수밖에 없다. 다음 버스는 6시 반에 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 없이 시골 생활을 할 때의 실상인데, 몇 번 해보면 또 해볼 만하다. 동네 할머니들은 평생을 이러고 사셨는데 마흔 밖에 안 된 내가 못할 게 없다.
#2. 버스킹
도시 촌것이 해남까지 와서 명절에 약속이란 걸 잡을 수 있었던 연유는 귀촌 프로그램을 하다가 알게 된 선생님 덕분이다. 나와 동갑내기이고, 나처럼 가족의 형성과 분해 과정을 겪었고, 나보다 종교적으로 더 나아가신 분이라(수도원에서 4년을 생활하심) 첫눈에 호감이 갔는데, 이번에 버스킹을 한다고 나를 초대까지 해주셨다.
직접 가서 보니 선생님은 노래를 어마어마하게 잘했고, 그 음악적 재능은 대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뒤에서 건반도 치고 기타도 치며 일당백을 하시는 어르신이 바로 선생님의 아버지신데, 젊을 때 기타리스트였다고 했다.
일흔의 아버지가 마흔의 딸이 부르는 노래에 기타와 건반으로 반주를 맞춰주는 장면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고, 그림 자체만으로 전해지는 울림이 깊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에 빠트리고 뭐 그런 것이기에 굉장히 생소한 감동이었다.
게다가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이 왜 이리도 많은지. 해남 사람들은 노래도 잘하고 빼지도 않았다. 오직 서울에서 온 한 여인과 일산에서 온 나만이 못한다고 사양하고 꽁무니를 뺐다. 도시인들은 대체 잘하는 게 뭔가.
#3. 소멸돼 가는 지역의 회장님
시골 사람들은 도시인들이 잘하는 게 ‘돈 벌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무슨 주민 자치회 회장님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해남에 만 원 주택이라든가, 월세 십만 원짜리 집이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없어서 이주가 어렵다고 했더니 애초에 그런 얘기들이 왜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심기 불편해하셨다.
왜 생겼긴, 실제로 전라도에 만원 임대 주택 정책이 있으니까 생겼지. 그러나 그런 정책들은 대부분 아이가 있는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나 같은 사람은 오기 어렵다고 하니, 그는 정착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어중이 떠중이에게 지원을 해줄 순 없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때부터 대화는 좀 치열해졌다. 나는 해남에서는 누가 어중이 떠중이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다며, 아이 있다고 지원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 지금 다 어디 있냐고, 해남에 대학 하나 없는데 애들 고등학생만 돼도 다 좋은 학교 있는 큰 도시로 가지 누가 여기 남아 있겠냐고 했더니 그 부분은 씁쓸하게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예산 지원에 따른 성과를 분기마다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지원은 단기 성과 보여주는 애 있는 가정에 가고, 그 외에는 있는 돈 들고 시골로 와서 알아서 집 짓고 살길 바란다는 건데, 솔직히 도시에 사는 사람 중 누가 시골에서 살고 싶어하는 줄 아냐, 바로 나처럼 없는 사람들이다. 없으니까 시골에서 속 편하게 살려는 거다.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려고 하지, 왜 집값 다 줘가면서 불편한 시골에서 살려고 하겠냐. 돈 있는 사람들, 애 있는 정상 가족들은 태반이 도시에서 살고 싶어한다. 나 같이 없는 사람들, 사고 방식이 이상한한 사람들만 시골로 내려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회장님 자녀도, 손주도 다 도시에서 살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미 회장님은 나와 대화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원래 진실을 입에 쓴 법이지.
그러나 소멸돼 가는 지역의 주민회장이여,
그대들이 원하는 정상가족, 있는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사고 체계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가난하고 이상한 1인 가족이 인구 정책의 유일한 해결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방 소멸은 정해진 미래다.
그러니 나 같은 인간에게도 만원 주택의 길을 열어줘라. 귀촌 센터 거주 기간을 2년으로 늘려달라.
그러나 안 하겠지. 분기마다 성과를 보여줘야 하니까. 그럼 나도 됐다. 내가 소멸하는 것도 아니므로.
아마 저출생 정책도 이런 식의 탁상행정으로 행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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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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