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7.-29. 해남 23~25일 차
#1. 해남 23일 차 : 송편 빚기
멘토가 해남 어느 면에 있는 청소년 센터장에게 내 이력을 말했고, 마침 센터에서 주최하는 송편 빚기 행사가 있어서 센터장이 겸사겸사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여 갔다.
송편만 빚었다.
호르몬 넘치는 초중등 10대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기가 빨렸고, 아이들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운다고 상처가 아물지 않을 텐데 넘어졌다고 우는 아이가 이해되지 않았고, 위로한답시고 그까짓 거 암것도 아니다, 라고 했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센터 직원에게 한 소리 들었다. 같이 호들갑을 떨어줘야 한다고 했다.
송편을 빚을 때도 멘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런 저런 재미없는 붙임성 좋게 그룹 안으로 끼어 들었지만, 나는 쟁반에 송편 재료를 담아 그들 뒤에서 홀로 고요하게 송편을 빚었다.
좋았다.
역시 난 아이들을 만족시킬 깜냥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은 것엔 이런 본능적인 결핍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의 안녕과 안전, 행복을 절대적으로 비는 사람이지만, 선호도의 측면에서 나는 어른을 더 좋아한다. 모두가 아이를 더 좋아하니 나 같은 사람도 한 명 있어 줘야 세상의 균형이 맞춰지는 법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에 이런 태도는 형편없는 것이고, 거기다 아이들을 위한 커리큘럼은 갖고 있지 않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덕에 센터장에게서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심 기뻤다. 이래서 내가 밥벌이를 못하나보다.
#2. 해남 24일 차 : 해나마조프가의 형제들
오늘이야말로 방에 틀어박혀서 소설을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숙소 사장이 귀촌 참가자 5인의 알바 비를 내게 전부 맡기면서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지난 축제 때 묵 파는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일당을 챙겨준 것인데, 지역 상품권으로 총 백만 원을 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알바라고는 하지만 귀촌 프로그램의 일환이기에 나는 내몫으로 떨어진 20만 원이 마냥 신이 났으나 누군가는 그러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지극히 합리주의자여서 이 일을 정식 알바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최저 시급도 안 되는 금액을 상품권으로 지급한 것은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노발대발했다. 추석이 끝나고 해남으로 복귀하면 자신이 총대를 메고 숙소 사장과 담판을 벌이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지독히 이상주의자였고, 우리가 축제에서 묵을 판 것은 숙소 사장과 누님을 인간적으로 도운 것이고, 회계 처리 때문에 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꾸는 것이 복잡하여 상품권을 준 것뿐이라며 절대적으로 숙소 사장을 옹호했다.
그 와중에 나는 이 둘의 싸움이 마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알료샤의 싸움처럼 여겨져 몹시 흥분했고, 돈을 앞에 두고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단톡방에 썼다가 분위기를 더 쎄하게 만들었다.
결국 우리 중 최고 연장자가 이것은 정식 고용 관계가 아니라 체험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무게추를 알료샤 쪽으로 가져갔고, 마지막 사람도 이것을 정식 알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대세를 확정지었다.
그러자 우리의 이반이 “그럼 다들 이런 처사에 수긍하는 것으로 알고 제 것만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한 달간의 우정에 쩌억 금이 가고 말았다.
그러나 나 역시 알바든 체험이든 수고비를 상품권으로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숙소 사장을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알료샤의 말대로 축제 때 받은 상품권을 전액 현금으로 바꾸는 것에는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반의 몫 20만 원과 내 몫 중 절반인 10만 원만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내 몫 10만 원은 왜 현금으로 바꿨냐면, 사장에게 복잡한 사정이 있든 어쩌든, 나 역시 급여를 상품권으로 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정식 알바가 아니므로 절반만 바꿔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상주의자들은 상품권으로 20만 원을, 합리주의자는 현금으로 20만원을, 양쪽에 비열하게 한 발씩 걸치고 있던 나는 반반씩 받게 됐다.
계산을 끝낸 후 나는 내 몫의 상품권 5만 원을 공탁금으로 걸어두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3일 반씩 일했는데, 나는 첫 문장 피드백을 쓴다고 하루를 덜 일했기 때문이다.
이 5만 원이라는 금액에 대해, 합리주의자는 내 계산이 정확하지 않다며 불만을 가질 것이고, 이상주의자들은 내가 먼저 돈을 공금으로 떼어 놓은 것에 박수를 칠 것이다.
사실 정확히 계산을 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32%의 시간을 덜 일했으므로 공탁금으로 6만4천 원을 걸어야 맞다.
그러나 내가 공론의 장을 만들었고, 숙소 사장과 불편한 대화를 했고, 차선의 결과를 도출해 갈등을 봉합했으므로 그 서비스 이용료로 멋대로 만4천 원을 떼고 5만 원만 공금으로 묻은 것이다.
내심 합리주의자 이반이 왜 5만 원만 내냐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돈 앞에서 그 정도까지 집요하진 않았다.
집요한 건 오히려 나다. 누굴 벗겨 먹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관대하지도 않은, 설명을 들어보면 계산은 맞지만 묘하게 기분 나쁜, 이것이 돈 앞에서 드러나는 내 본성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굳이 한 명을 고르자면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와 영혼이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우리의 공금은 이제 10만 원이 됐으니 추석 이후 해나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돌아오면 이 돈으로 뭘 먹을지 고민해야겠다. 당연히 사장님과 누님도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메뉴는 중국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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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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