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심과 고독함 사
2025.09.30.-10.2 해남 26~28일 차
#1. 해남 26일 차 : 이래서 시골살이를 하는가 보다
완벽한 하루였다. 붙잡고 있던 원고를 보냈고, 느지막이 계란을 사러 마트에 갔다가 오는 길에 숙소 사장님을 만나 차를 얻어탔다.
가장 가까운 마트가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어서 아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차를 얻어타는 것이 좋다.
그 와중에 오전에 낚시를 떠났던 아저씨 한 분과 누님이 고등어를 낚았다며 공용 주방에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연락을 해왔다.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주방에 가보니 완벽주의자 아저씨가 각을 재는 것 같은 정밀함으로 오늘 잡은 생선을 손질하고 있었고, 누님은 그중 조기 몇 마리를 가져와 야외 식탁에서 매운탕을 끓이고 계셨다. 식탁 너머론 봉이와 사랑이가 얌전히 엎드려 있었고 국물 맛은 완벽했다.
이래서 시골살이를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게 진짜 시골살이일 리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시골살이라는 게 이렇게 붓으로 그린 듯 이상적일 리가 없었다. 날씨도, 사람도, 그리고 고등어 튀김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2. 해남 27일 차
추석을 쇠러 누님이 떠나고 완벽주의자 아저씨도 떠났다. 숙소 사장 내외도 종일 집을 비웠다. 홀로 책을 읽고 산책을 했다.
#3. 해남 28일 차 : 이래서 시골살이를 안 하는가 보다
누님도 떠나고 아저씨들도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아무도 내 방문을 두드리지 않은 지 고작 이틀이 됐을 뿐인데, 나는 이미 적막감에 압도당해 있었다.
1초, 1분. 시간이 흐르는 게 눈에 보이고 우주엔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숙소 사장 내외가 옆방에 있지만 사장 부인이 귀촌 프로그램 자체를 안 좋아해 얼굴을 비추는 일이 없으므로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게 아마 내가 시골에서 혼자 살면 실제로 느끼게 될 기분일 것이다. 역시, 엊그제 화기애애는 다 신기루였다.
지금껏 이곳에서의 생활이 이상적이었던 이유는 시골에서 살고 싶은 도시인을 나 말고 넷이나 더 만났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지내는 곳이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서 시골 사람들의 텃세라든가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진다는 주거 침입과 같은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을 산책할 때나 버스에서 만난 현지인과 잠시만 대화를 나눠도 나는 마을에 위화감 없이 섞여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현지인 여인은 나이가 쉰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동네 사람들이 누군가의 아들에게 붙여주지 못해 안달이라고 했다.
다행히 그 여인은 오빠와 살고 있어서 크게 불쾌한 일은 겪지 않았지만, 누구와도 살지 않고 이곳에 어떤 연고도 없는 마흔 살 여자라면?
일이 험하게 돌아갈 수도 있다.
모두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는 마을 안에 있거나 우주 한 귀퉁이에 내쳐진 것 같은 산골 적막 속에 있거나.
시골에 살려면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 같은데 후자를 택하고 싶어도 그런 땅과 집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역시 엊그제의 경험이 너무 완벽했다. 원래 그렇게 좋은 건 지속되지 않는 법이다. 우연히 고등어가 잡혔고, 우연히 네 사람만 남았고, 우연히 차를 얻어타서 식사 자리에 늦지 않은, 몇 겹의 우연들이 빚어낸 풍요롭고 맛있었던 시간.
오늘은 고독하고 불안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차표를 끊었다.
나는 여기 왜 왔을까.
내가 홀로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그리고 이 아름다운 우연의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이제 삶의 방향을 찾았다거나 앞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이 생겼다거나 하는 건 없다. 그런 건 원래 없다.
그저 아주 새까만 밤을 봤고, 자연의 소리에 짓눌렸고, 소들에게 인사했고 개하고는 싸웠다. 그리고 아주 많은 고구마와 대추를 먹었다.
나는 그러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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