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6. 해남 20일 차 : 영암, 심포지엄, 반가운 그 아이
이 숙소에서 나는 조금 인기가 많은 편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모처럼 홀로 있는 시간이 길게 확보되어 소설이나 좀 다듬으려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이곳저곳을 가자고 연락이 온다.
어제 분명히 연휴 내내 짱박혀서 소설을 다듬을 거라고 모두가 있는 곳에서 선언했는데, 시골 어른들은 마흔 살 조무래기가 하는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대체로 잘 거절하는 편이나 영암 축제에 가자는 숙소 사장 누님의 제안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원래 밥 주는 손은 거역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시골 분들은 너무나 즉흥적이어서 “언제 가실 건데요?” 하고 물으면 “응, 한 시간 정도 있다가~”라고 답한다.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 쓰려고 온 것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된 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서기로 했다. 사실 조금 설레기도 한다. 영암이라니! 무화과의 도시잖아!!
***
여기까지 쓰고 영암에 갔다 왔다.
알고 보니 축제가 아니라 심포지엄이었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학술 대회였다.
관광 산업 육성을 주제로 한 강의와 토론이 이어졌는데, 본인들 힘들다는 얘기가 절반, 실효성 없는 탁상공론이 절반이었다.
2030 여성을 타게팅 한다면서 연단에 앉은 여섯 명의 연사들은 죄 환갑 줄의 남성들이었고, 프로그램을 시행한 지 3년 차라면서 정확히 뭘 했다는 건지, 앞으론 뭘 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알맹이가 없는 말을 3시간이나 하고 있으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청중을 지루하게 만드는 연사는 교수형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길 만큼 이런 식의 형식적인 강의나 포럼 등을 지독하게 싫어한다.
그리하여 심포지엄이 2시간을 넘어서면서부터 내 귀한 시간을 죽이는 교수와 무슨 무슨 대표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고,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숙소 사장과 누님까지 몹시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강의 중에 뒤를 돌아 숙소 사장을 5초 정도 노려본 후 “언제 가?”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나보다 열 살 혹은 스무 살 정도 많고, 건축 현장 일로 몸이 다져진 사람이라 나 같은 건 한 손으로도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나, 한계점에 다다른 나는 이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므로 세상 모두와 싸울 수 있다. 내 12번째 자아가 작동하는 시간이다.
나의 무례에 사장님은 당황했고, 누님도 당황했고, 그러나 당황만 하고 여전히 갈 생각은 안 했으므로 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강의 도중 가방을 싸서 나와버렸다.
영암에서 해남 숙소까지 갈 길이 까마득했으나 앞서 말했듯,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므로 이쯤은 문제도 아니다. 지루한 강의라는 게 이토록 사람을 미치게 한다.
다행히 놀란 사장님과 누님이 따라 나왔고, 이 작은 미치광이를 차에 태우지 않으면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았는지, 당장 시동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올 때 누님은 나와 같이 뒷자리에 앉는 대신 앞자리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뒷자리에 홀로 앉은 나는 월출산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논밭이 어쩜 이렇게 끝도 없이 펼쳐질 수 있냐고, 다시 예를 갖춰 영암과 해남의 아름다운 풍광을 찬미했다.
누님은 이제 내게 어디 가자는 얘기 다신 안 하려나? 그러나 누님, 내 모든 측면이 미친 것은 아니고 절반 정도만 미쳤을 뿐이고 그 절반의 나를 불러낸 이도 누님이었으니 나를 너무 징그럽다, 내치지 마시오.
영암도 구경하고, 월출산도 구경하고, 오랜만에 내 12번째 자아도 구경하고. 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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